걷기

3월28일 생강나무-9(끝)

우두망찰 2005. 9. 14. 15:54
 

9.


리는 이미 어두워진 산하촌.

번잡하던 한 낮 인파가 썰물처럼 빠져나가 이제 한적하기조차 한

그 산하촌에서 조촐한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내려오며 우리가 나눈 얘기는 주로 어릴 적 얘기들이었다.

몇몇 지기들 얘기도 나왔지만 대부분 내가 전해주는 쪽이었고.


그녀는 그녀에 관한 말을 대체로 아끼는 편이었다.

그래 나도 그녀가 말하지 않는 이상 굳이 더 캐묻지 않았고.

그래 나는 그녀가 지금 누구와 사는지, 어디서 사는지, 자녀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술 한 잔 할레?”

그녀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나는 내 잔을 자작으로 채운 후 그녀들 잔에도 한잔씩 따라놓았다.

그녀는 한때 요식업 - 복어 요리 집- 을 하기도 했단다. 장사는 잘 되었지만,

그래 돈도 많이 벌었지만 성가신 일들도 많아 접고 (미모는 늘 성가시다.)

이민도 생각해보고, 이일 저일 손대다가 손해도 많이 보았단다.

그래 다 정리하고, 좀 편히 여유롭게 살자. 못다 한 공부나 해보자는 생각에

모 대학 사회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다 지금 동행한 여인 -후배를 만나

지금 같이 테디 베어 샵을 운영한다고 했다.

“테디 베어, 곰 인형?” 


좀 더 활동적인 일이 그녀에 더 어울릴 거란 생각이 언뜻 스쳤지만

어쩌면 지금 일도 그녀에게 괜찮겠단 생각이 뒤따랐다.

그 후배 또한 마치 어릴 때 그녀를 보는 듯, 가끔 정물 같은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 우리 얘기를 듣고 있다 그 곰 인형, 전설에 관한 얘기를

잠시 들려주었다. 그 목소리하며, 표정이 마치 그림자수업을 받은 여자

닌자처럼 조용하고 갸름해 왠지 아직 애잔함이 묻어나는데

그녀와 닮은 점, 나이는 쉬 짐작이 되지 않았다.


“여기 자주 와?”

“아니”

그러고 보니 산에서 자주 보는 그런 여인네들 복장은 아니고

좀 가벼운 일상복, 간편 차림이어 어쩌다 들린 것인 듯 하다. 

그녀를 바라본다.

어쩔 수 없이 세월의 흔적이 얼굴에 스며있다.

그러나 그 수려하든 옛 모습, 자태는 여전했고, 대신 어떤 연륜

경륜 같은 게 지금에 이르러 어떤 깊이로, 관조의 모습으로 얼굴에

심심히 배어 묻어난다.

짧은 머리. 한 두올 그녀의 흰머리가 아름다워 보인다.

나는 저으기 안도했다.


“우리 가끔 만난다. 너도 나오지.”

나는 내 연락처를 주었다.

“글쎄, 기회가 되면.”

“쓸데없는 소리. 지금이 기회지.”

조금 씁쓸한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번졌다.


지금도 그녀는 그 때의 그 전통관습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한 걸까?

마을의 누구도. 딸네도 며느리도. 이혼도 재혼도 하지 않았다는 그.

그 이전에나 존재했고, 그 이후로 곧바로 무너져 내렸을 그.


아마 그렇지는 않으리라. 

그러나 세상을 향하고는 그렇더라도, 그 동리를 향하고는

그녀 스스로 편키는 결코 쉽지 않으리라.

그것은 아직도 지켜야할 도리, 이어받아야 할 가치 따위여서가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에게 한 약속. 스스로 지탱하려 스스로가 기댄 버팀목.

그녀의 마지막 자존심이었을 테니까.




*

제 때가 되었다.

여전히 나는 그 옛날처럼 더 이상 그녀를 붙들고 있을 아무런 이유도

명분도 없었지만 이제는 아니라는 느낌도 들었는데...

‘누가 그 문을 열어 주어야 해. 스스로 열기는 벅차.’


그녀가 누군가?

그녀가 대체 누구인가?

그녀는 이미 내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더없이 친밀한 친족이상. 친구 이상.


“늦었는데 그만 들어가라.”

나는 그녀에게 요구해 그녀의 전화번호를 받았다.

우리는 천천히 그녀가 차를 세워놓은 곳까지 함께 걸었다.

“만났단 얘기는 하지 않을게.”

그러나 그 말도 하지 않았다. 잘했다.

기대대로 그녀도 그런 부탁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살아온 생. 그녀가 헤치고 온 생. 그래 그녀가

끝내 극복하고, 지금 편안하고 담담해진 얼굴을 하고 있으니......

어쩠든 그녀도 나와 달리 지사스러운 면모가 있으니까.


한잔 술 때문인가. 밤 기온이 시원했다.

“날씨 좋은 걸.” 

그녀가 가까운 곳까지 태워 주겠노랐는 걸 굳이 사양하고

나는 멀어져가는 그녀 차 뒤꽁무니 불빛에다 대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아, 너무 아득하다. 200x년 3월 28일

내 생의 어느 오후.

생강 꽃 핀 날.






- 끝 -





(注意 : 이 글은 단지 소설입니다. )


그런데 묘하게도 그 후로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

이 글을 쓴 것이 그러니까 2004년 봄. 아무런 의미 없이 소설 속 한 장치로

끌어다 쓴 테디 베어에 관한 일이 실제로 2005년 현실의 일로 나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즉 제주에 가면 이 인형 관련 박물관이 있는데, 그 사업을 하시는

이의 차기 사업계획에 내 직업분야의 일이 내게 의뢰된 것이다.

그러니 이게 어찌된 셈인가? 세상에 이런 우연도 있는가?

그분과 나 사이에 어떤 사전인연, 교감 같은게 있을 리 없고, 그렇다고 이 시덥잖은

글이 제 스스로 세상으로 걸어나가 그분 눈에 먼저 띄었을 리도 없고.....어쨌건

기화로 이 세상에 나온 모든 테디 베어 곰 인형은 구경하게 되었으니. 

지금도 인연이니, 운명이니 하는 것들을 가로 늦게라도 믿어야 하나?

참으로 묘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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