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3월28일 생강나무-7, 8

우두망찰 2005. 9. 13. 12:11
 

7.


디어 징집 날이 한달쯤 앞으로 다가 온 어느 날.


(돌이켜보니 확실한건 그 날이 13일이었고, 금요일이었고,

그 5월13일의금요일이 입대일. 내 징크스 시작일임이 이를

기화로 확실해졌다.^^)


지금도 잘 모르겠다. 내가 왜 그랬는지를.

왜 그때까지 까맣게 잊고 있던 그녀가 하필 그때 불쑥 생각났고

내가 왜 그녀를 찾아갔었는지를.

다만 그 생활에도 지친 내가, 드디어 한라에서 백두까지

가 아니고, 기껏 설악까지. 무전여행을 하며, 기실은 가끔

유전여행도 하며. 남은 한달을 빌빌거리기로 몇 놈과 작당하고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 -순례가 아님을. 그녀만은 이해해줄 것이라

들어줄 것이라 생각했었는지도 모른다.    


하여 그 중에 꽤 쓸만하다 생각되는 한 녀석을 꼬드겨 나는 참

괜찮은 여자를 소개시켜 주겠노라 하여서는 아무런 사전연락 없이

-하긴 그때는 전화도 일상적 소통수단이 아니었으니 -핸 펀은 물론 -

전화번호도 몰랐지만 -그렇다고 편지를 쓸 생각은 더 더욱이나 없었고

-그리 용의주도하게 계획한 바도 없이 -무작정 -그냥 -불쑥 그녀를

찾아간 것이다.

(내게 이런 무질서하고 무절제한 어투의 일면이 아직도 남아 있다면

그건 분명 그때 심경의 일단 -황폐하고 피폐한 착란의 결과로 존재

함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맘때인가 보다. 퇴근시간이었고, 날씨는 꽤 쌀쌀했었다.

나는 그때껏 한번도 가보지 않은 그 면사무소를 (우리 동네는 외져

출장소관할이었다.) 다짜고짜 찾아 갔었고, 용감히 쳐들어갔었고,

그래서 갑자기 쏠린 그 뭇 호기심어린 시선들에 당황하여 우리는 참

황급히, 어색하게 그곳을 나와 역이 내려다보이는 시골이층 다방으로

올라갔었을 것이다.


“오랬만이다.”

“그래 참 오랬만이네. 잘 있지?”

“응, 그래.”

“그런데 너도 군대간다며?”

“응, 그래.”

그녀는 내가 군대를 간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나 보다.

하긴 같은 또래 불알친구 모두가 함께 징집명령을 받았으니 알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어떤 의미가 있었던 건 애시당초 아니었겠지만.

“잘 갔다 와라. 건강히”

“응, 그래”


그리고는 끝이었다.

겨우 십분.

우리는 아무런 맛도 없는 차를 마셨다.


(형편없이 너저분한 복장과 꾀죄죄한 몰골, 당시 사회에서 그토록

금기시하던 장발을 한 정체모를 이방인과(Beast), 또 한쪽은 도대체

눈길을 어디다 둬야할지, 차라리 감아야할지, 아니면 사시가 되어야할지,

그도 아니면 백안시라도 해야 할지 도통 정신이 아득한 미녀(Beauty)가

백주대낮 큰길을 함께 걸어와 “응, 그래.” 단 세 마디말로 끝을 맺으니.

이 얼마나 완벽한 대화인가? 이건 분명 뉴스거리다.

거리는 갑자기 술렁였으며, 사람들 눈은 반짝였으며, 호동그란 고양이 눈.

새카맣게 반들거리는 생쥐 눈까지 겁 없이 합세하여 모두들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으니. 때 마침 먼 서역에서부터 찾아와 온통 세상을 달뜨게

하는 묘한 재주를 지닌 내 막역지우, 황사바람도 그때 막 불기 시작하더라.)


너무도 작은 시골면 소재지. 기껏 수 백호.

그래선지 그녀는 주위 시선에 필요이상 신경을 쓰는 듯 했다.

하기사 내게야 낮선 동리지만 그녀에겐, 더욱이나 그녀 같은 미모면

벌써부터 무수한 시선이 집중될 것은 너무나 당연할 터.

외양상 예 -우리 특유의- 를 다 갖추었지만 그래도 몇 년 만인데

그녀가 왠지 겉돈다는 느낌에 나는 좀 많이 섭섭해 있었다.

‘아무리 소원했기로서니. 내가 생각하는 우리 비중은 이게 아닌데….’


더 형편없었던 것은 친구 녀석이었다.

허우대도 멀쩡하고, 얼굴도 그만하면 준수하고, 성격도 밝아 유머도 풍부한데,

생각과 심지까지 이외로 깊어(이 또한 얼마나 완벽한 구색인가?)

그만하면 대충 어울린다, 내가 점수를 후히 주어 점지한 그 녀석은. 평소 같으면

충분히 그러지 말아야 할 그 중요한 순간에 -그 순간이 어떤 순간인지

정확치는 않지만 하여튼 그 순간에, 그만 말 한마디 못하고 굳어버린 것이다.


어쩔 것이냐.

기차시간은 금방 다가왔고,

그녀는 가야했고. -그녀는 이미 거처를 읍내로 옮긴 터였다.

버스를 타고 시골집으로 가야하는 나는 더 이상 그녀를 붙들고 있을

아무런 이유도 명분도 없었다.

하지만 내가 굳이 원했다면 그녀를 따라 거기서 머잖은 읍내로,

내게도 익숙한 그곳으로 같이 기차를 타고 갈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은연중 내가 바랐을 어느 생맥주집이나, 강변에라도 나가

밑도 끝도 없는 얘기를 -밤늦도록 -횡설수설 -술에 취해 -장황하게

-참으로 심각하게, 늘어놓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왜냐면,

그 나이엔 그게 어울리니까.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우리는 아무도 지키지 않는 그 한적한 시골 역을, 석양의 그 시골 역

플렛 폼을 마치 영화를 찍듯 끝까지 걸어갔다. 돌아왔다

드디어 기차가 오자 그녀를 배웅하고는 조용히 돌아섰다.

왜냐면,

그게 멋있으니까. 


“다음에 보자”

“그래 조심해서 잘 갔다 오고.”

이미 엷게 화장도 하여 왠지 성숙하고, 왠지 누나 같고, 왠지 친구

아닌 것 같았던 그녀의 그 눈부신 마지막 미소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아, 지금도 생각난다.

 

 

 


 

 

 

 

 

....................................................................................................

 

8.


녀를 보내고 돌아 나오며 나는 괜스레 친구 녀석을 쪼았다.

“ 왜 춥냐? 이 벼엉신.”

“ 와, 범접 못 할 뭔가가 있어.”

녀석은 형편없이 풀이 죽어 있었다. 그리고 마치 무엇에 감전되기라도

하듯 감동하여 자기 같은 불한당은 도저히 상대가 될 수없다. 모욕이고

모독이다. 이리 깊이 뉘우치며 그간의 막된 생활을 반성하는 듯 했다.

‘그래, 그래야겠지. 그 빛에 다가서려면….’


우리는 주막으로 갔다. “나도 한참 정진해야 겠어.”

녀석이 뜬금없이 무슨 장한 결심이라도 한 듯 이리 선언하고는

내 힐난조 목소리에 더 이상 대꾸 없이 조용히 술만 들이켰다.

그래 나도 술만 들이켰다.

그리고야 끝이었다.


(아니 끝이 아니었다.

그 술렁이던 거리분위기를 수상히 여긴 그곳 순사가 냄새를 쫓아

와서는 그만 우리의 그 탐스런 장발을 싹둑, 가위로 잘라버린 것이다.

그 순간 우리는 더 이상 고뇌하는 지식인도, 방황하는 화란인도, 시대를

짊어지고 갈 자랑스런 젊은이도 아닌, 그냥 그런 거리의 부랑아, 양아치로

한순간 전락하고 말았다. 어디 머리칼 잘린 삼손이 삼손이던가?

나는 아직도 그 순간을 분개한다.

뒤에 알았지만, 그 사건의 배후에는 나도 모르는 치밀하게 계획된

어떤 불순한 의도가, 모종의 은밀한 의도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 나는 아직도 그 시간 그 장소에, 그 순사를 급파한 그 파출소장에게,

그 파출소장을 불러 모종의 지시를 내린 그 모종의 세력에게,

그 비열한 음모와 더러운 흉계에 대해 말할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

왜냐면...


치우자.

버스 지나고 손들기. 밤길 삼십리. 남도 삼백리.

별이 총총 총 삼백 삼 십리.

밀밭에 달 가듯 걸었으면 됐지. 운동했으면 됐지. 공부했으면 됐지.)     



녀가 왜 그날 그리 행동했는지, 왜 그리 나를 홀대하여

한동안 내 가슴을 쓰리게 했던지, 그 의문은 머잖아 쉽게 풀렸다.

내가 입대를 하고 얼마지 않아 -실은 얼마가 지나서인지도 확실치 않지만

- 그녀는 바로 결혼을 했던 것이다.

그 면사무소 마을출신으로 예전 같으면 육조 이상의 고위 관직일

-혹자는 그 집안이라고도 하고, 명문세가의 백마 탄 왕자가 어쩌다

그녀를 낙점했던가 보다. 그러니까 그때는 한창 연애 중이었을 테고...

더 흉한 소문 -폭력이 개입되었다는, 믿지 못할 루머도 언 듯 떠돌긴 했지만

천부당만부당함이 이내 밝혀졌고.


이 모든 얘기는 내가 부러라도 고향 친구들을 만나면 물어보지 않아

어쩌다 풍문으로 들리는 걸 막연히 짐작하고 재구성한 결과이다.

하여튼 그녀는 그리 일찍 시집을 갔고, 우리들 시야에서 홀연히 사라졌다.

서울에서 열린 결혼식엔 그녀의 가까운 친척 외, 친구들은 아무도 초대받지

못한 모양이다. 물론 아직 우린 그럴 나이들 -결혼식에 나다닐-도 아니었고.

나 또한 그때의 일을 잊고 그 다음 내 건강한? 생활에 파묻혀 버렸고...


-다시는 뭘 읽지도, 쓰지도 않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나는 그 약속을

충실히 지켰다. 다시 말하면 윤리도리진리심리사리논리철리궁리병리 따위는

접고, 대신 훨씬 고등한 물리(物理)를 택했다. 小說을 버리고 中說을 지나

大說을 건너뛰어, 마치 지구에 자오선 긋듯 한 치의 어긋남 없이, 분명하게,

험준한 산맥, 거친 들판, 광막한 대양을 가로질러

,

일목요연 질서정연하게 이 세상을 일직선으로 정리해 버렸다.

그리하여 세상은 명확하고 명료하고 명징했으니...

먹으면 싸고, 더 많이 먹으면 토하고, 생하면 멸하는 생로몰무(生老歿無)

생리生理의 땅에다 뿌리를 내리고 한낱 자연, 그의 일부로 이 한 세상 거치기로

해따.- 그래서 아직도 그녀는 우리에게 오리무중이고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그러나 그 후로도 고향친구들을 만나면 그녀에 관한 뜬 구름같은 소문이

들리지 않은 건 아니다.


“그녀가 이혼을 했데.”


“서울서 요정을 한다는 걸.”


“누가 길에서 우연히 그녀를 만났데.”


그러나 나는 정말 더 이상 묻지 않았고, 오히려 그녀 얘기가 나오면

은근히 화제를 딴 곳으로 돌리는 쪽이었다.

‘그런 까십성 얘기도마에 그녀를 올리다니. 고얀 것들.’

(나는 천한 것들이란 표현을 억지로 참는다.) 

그녀의 오빠가 지역 자치단체장에 출마해 낙방했다는 소식도

그녀 남동생이 무슨 고시를 패스해 중앙관서 요직에 있다는 소식도

다만 풍문으로만 들었을 뿐. 어디서도 그녀는 그녀의 실체를 드러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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