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3월28일 생강나무-3, 4

우두망찰 2005. 9. 10. 13:03
 

3.


녀가 누군가? 그녀는 대체 내게 있어 누구인가?

생각하면 참……. 그렇다. 기실은 아무것도 없는지도 모르겠다.

감쳐진 비밀. 애틋한 사연. 함께한 추억. 불같은 사랑. 운명의 장난….

아니다. 모다 아니다. 그런 건 다 최소한 내게 너무 현대적이거나 통속적이다.

그러나 그 어느 것 아니어도 둔중한 울림이 있으니…….

세상엔 평생 입 밖으로 내어 말하지 않은, 말 할 수 없는 이야기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녀는

나와 한 동향, 한 고향출신인 친구사이이다.

어디 그뿐이랴. 동갑이기도, 한반이기도, 심지어 성씨마저 같은 종씨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단짝이었거나, 짝지였거나, 둘만의 내밀한 무엇, 많은 시간을

함께한 사이는 아니다.

생각하면 기실은... 얘기도 한번 제대로 길게 나눠 본 적 없는 맹맹한 사이이기도 하다.


가 나고 자란 고향마을.

그녀도 함께 나고 자란 우리의 고향 마을

그 십리상거 사방이 산들로 오목이 둘러싸인, 외부와 거의 완벽히

차단된 분지 형 산골마을. (마을에 버스와 전기도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들어왔다.)

그 산골마을에도 전쟁의 참화가 휩쓸고 갔고 -최전선이어 당연

피해도 많았을 것이고. 전쟁이 끝나자 사람들은 마치 악몽을 씻기라도 하듯 열심히

아이를 낳았을 것이다.

-그래서 한 학년 한 학급이었던 그 조그만 산골마을 학교에서 유독 우리학년만

80명이 넘었고, 전 후 학년 대비 이십 여명은 더 많았을 것이다.


또 있다.

전형적 씨족마을. 대대로 내려온 집성촌 마을.

그래 그 십리 골짝 중앙에 들판을 두고, 십여 마을이 이삼십호씩

이편저편 산자락에 깃들어있었는데, 그 중 한마을만 유일하게 타성.

나머지는 모두 같은 성씨 사람. 즉 친척, 친지, 친족들이었다.

어쩌다 콩에 팥 섞이듯 했던 타성은 이미 사라진 제도의 유산으로

그나마 아직 떠나지 못한 불행한 처지이거나

외지서 흘러들어온 상대적으로 외로운 사람들. -사실 그랬다.

그러니 한 다리 건너 모두 형, 아우, 아제, 아지매 천지였던

참 특이한 세상.


녀를 얘기하자면

그녀와 나 사이를 정확히 얘기하자면, 또 이런 얘기도 빼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그만한 시골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있을 수 있고 생길법도 한

로맨스, 스캔들 같은 건 전무했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은.


신분상 차이가 없는 십 프로쯤의 타성씨도 있었는데 설마 그러려구?

의구심이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그 동리의 특성을 잘 몰라서

하는 말. 구구절절 다 설명할 수야 없지만 여하튼 연애질이란 전 왕조

시대보다 더한 율법이 한 치의 양보, 타협 없이 그대로 이어져 내려

마치 시혜를 베풀 듯 온 마을사람에게 -타 성씨에게도- 골고루 강요되었으니.

(아직도 주자 유학이, 그 중에서도 사단 주리중심으로

기세 등등 살아 있었다.


오죽하면 고개 하나만 넘으면 그 흔하던 예배당, 공소는 물론,

전통적 절간마저 육칠백 년 된 고목, 그에 걸맞은 석물(石物)들만 남기고

폐사지로 남았을까. 대신 사당, 제실, 서원, 서당 같은 건 흔했는데

서당은 불과 오년 전까지만 해도 그 명맥을 유지해 방송을 타고

중앙 유력일간지 가례도감에는 관혼상제, 전통예절에 대한 모범답안으로

그 마을 예법이 사진으로 실려 있다.)


그러니, 그런 일이 있다면 그것은 어쩌다 그들 십프로 끼리만 일어날 수

있는 딴 나라 이야기, 즉 소설 속 이야기였던 셈이다.

오죽하면 한참 민감하든 청소년기, 황 순원의 소나기를 내가 그리 부러워했을까.

그 스토리도 스토리이지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그 무대, 환경이 너무나

부러워 나는 왜 그런 동리에서 태어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늘 있었다.


어쨌거나, 대단히 보수적이고, 폐쇄적이고, 전통 중심적이고, 고집불통

체면우선시하고, 허례허식 배타적이기도 하여, 세상을 우습게, 골짝 밖

사람은 모두 뿔 하나쯤 달린 불한당시 여겼던 엉뚱한 자부심과 미풍양속

(본받을만한), 공동체 의식(좋은 의미의)의 원형질을 그런대로 잘 유지하며

고만고만 살아가던 살가운 동리.

 


전설 같지만 예전에 그런 동리도 있었다.


 

 

 

 

 

 

 

 

 

<너무 기니 여기서 고만 읽으세요.^^>

 

 

 

 

 

 

4.


시 본 이야기로 돌아가자.

그럼에도 불구 사실 우리는 거의 부딪힌 적이 없다.

친척이라 하기엔 촌수 대기가 너무 멀어 제사마당, 집안

애경 사에서도 만날 일 없고,

사는 동리가 다르니 아침저녁 동구 길에서 부딪힐 일도 없고

그 자그마한 소학교도 겨우 반만 다니고 철이 조금 들 무렵 나는

대처로 강제 전학되었으니….

그나마 우리가 다시 만난 것은, 그러니까 그 시골동리로 버스가

다니고부터인가보다.


대처로 나가긴 했지만 아직도 코흘리개 어린애였던 나는, 주말이면

몹시도 그 곳, 엄마 품이 그리워 뻔질나게 드나들었는데

두어 시간 버스타고 가 하룻밤 자고 나오던 그 중학시절에도

그녀를 만난 기억이 별로 없으니 정작은 고등학교 때부터인가 보다.

어느새 우리는 훌쩍 컸고

선후배란 전과는 다른 사회적 관계 맺기와 더불어

혈연이란 태생적 사회구조의 예의규범도 그대로 적용 통학버스

-그들에게, 안의 그 독특한 풍경이 자연스럽게 연출되었던 것 같다.


공적 가치우선, 공동체적 집단훈육의 결과로 스스로도 의젓해지고

싶어 했고, 어쩌다 빈 자리는 의례 앉지 않는 것. -그래야 어른들이

편하니.― 끼리끼리 어울려 흔들리며 국가 사회 민족 따위, 거대 공리공론

(空理空論)도 마치 공리공론(公利公論)되는 냥 착각하여 열심이었고,

어쭙잖게 벌써부터 ‘자네’ 같은 호칭도 쓰며 스스로 대견해 하기도 했다.


(하기사 아직 산업의 중심은 농경. 상록수 정신이 살아있고 

새벽종이 울렸네. 가 한창 성가를 구가하던 시절이기도 했으니

어느 곳이라고 크게 다르랴만. 때 마침 조국 근대화에 발맞추어

자구 몇 자 만 겨우 근대화시켜 우리 마을 정신을 그대로 모사

표절한 듯한 그 때 그 궁민교육헌장이 우리에게 하나도 낮 설지

않고 친숙했으니, 일러 무삼하리요.

그러나 한편으로 나는 약간 이질, 이단적 요소가 섞인 -성장과정,

학교가 다른 만큼의- 국외자의 시선으로 그들을 관찰하기도 했다.

-아니, 내가 관찰 당했었나?)


여자들과 어울렸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이미 생물적, 자연적 이성이 아닌, 사회적 이차관계 -혈연이

우선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다보니. 오히려 학교에서 남모르는

사이들보다 더 격의가 없었으며, 이 역시 남자들 끼리에서처럼

비슷한 주제의 점잖고, 허울 있는 얘기들만 주로 했다.


생각해보라. 그런 환경에서 내외한다는 게 얼마나 부적절하고

어색할 것인가를. 그런 연유로 나는 아직도 나와 동갑나기인 시골

사촌누이를 만나면 그때의 그 특유의 어투가 고스란히 남아 있어

-지금도 그녀는 나를 ‘자네’라 부른다.―  꼭 유 관순 누나나 채 영신

보는 듯, 그 지사(志士)스러움에 웃음이 나곤 한다.


(내게 너무 지나치게 엄숙한 사고방식의 일단과, 정색하는 버릇,

유연성 없이 경직된 멘탈리티가 있다면 이는 바로 이러한 성장토양에

뿌리를 둔 것이다.)


랬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 사람끼리는 친소가 있는 법.

뜻이 통하고, 서로 호감이 가고, 그래서 남달리 좋은 감정을 서로

느낄 수도 있는 법.

그녀는 내게 있어 바로 그런 범주에 드는 인물이다.


상당히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이면서도, 외모 또한 뛰어나

(예쁘다는 표현보다는 아름답다는 말이 더 맞다.)

암암리에 우리들 사이에 인기가 많았는데

늘상 그렇듯, 너무 뛰어나면 사람들 스스로가 자격지심에 거리를 두는 법.

그녀 또한 아버지를 일찍 여윈 탓인지 늘 말수가 적고 차분했으며

-서늘했으며, 그래 곧잘 대화에 어울리기도 했지만

좀 어려운 구석이 있었는데. 그 뛰어 난 두뇌, 수려한 외모로도

어려운 가정형편에 고등학교를 졸업, 바로 그네 오빠의 권유로 지방

행정공무원이 되었든가 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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