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남쪽바다-4 (12~13)

우두망찰 2005. 9. 16. 15:38
 

12.만월이 떠 있었다. 

 


 

육지는 바다와 친해지려는 듯 낮게 엎드려 있었고 해안은 굴곡이 심하여, 내가 있는 곳은 깊숙한 내만. 그래서 바다는 밀려났다 다시 들어 올 때에는 멀리서부터 흰 이빨을 드러내고 웃으며, 악동처럼 그 길목의 온갖 쓰레기들을 깃발처럼 흔들며 들어오곤 했다.


그러나 물은 맑고 따뜻했으며, 처음 보는 기이한 남국의 키 낮은 식물은 선인장처럼 물을 잔뜩 머금어, 그 두터운 잎새에 어울리지 않게도 앙증맞고 선명한 붉은 꽃들을 터트려서는 안 보는 척하며 돌담 사이로 우리를 훔쳐보고 있었다.

나는 내 아이와 왼 종일 그 바다를 드나들고, 벌거벗은 체 낮 선 곳을 돌아다니다 동물처럼 원시의 그 냄새들을 맞곤 했다. 그러다 또, 언젠가 북 아프리카 해안에서 보았던 인적 없던 고대 로마 유적지가 나타나고, 아무도 없던 그 폐허의 유적. 어느 집 테라스로부터 이어져 바다 속으로 사라지던 - 비취빛 대리석 타일이 정교하게 깔려 있던 - 그 길이 나타나고, 그 때의 경이처럼 아무 말 못하게 달이 떠올랐을 때. 나는 아이를 태우고 마을을 벗어나 저 멀리 바다 쪽으로 사라지던 길을 따라 달맞이를 가고 있었다.


길은 투박한 시멘트 포장길로 중간 중간 벗겨지고 심하게 구부러져 험했지만 끝없이 이어지고, 우리는 원숭이처럼 꽥꽥 소리를 지르며 희희낙락하고 있었다.

양안에 파도가 거칠게 철썩이고, 자욱이 해무가 피어올라 달빛인지 안개인지 구분이 모호한 속에서 우리는 또 술래잡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새 아이는 슬픈 표정으로 바뀌며 ‘이제 그만 돌아가자’ 고 했다.

그러나 나는 바다 속으로 들어가 그 길을 보자고 했다. 오늘 같은 밤, 물속에서 달을 보면 그 신비한 길이 보일 거라고 했다. 그러자 아이는 울음을 터트렸다.

‘두려워 말거라 얘야. 이 세상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단다.’

그러자 갑자기 창백한 은빛의 바다 요정이, 쓰러져 있던 차가운 대리석 조상이 나타나 아이를 데리고 가겠다고 했다. 나는 안 된다고 소리를 지르며 급히 아이의 손목을 잡고 달렸다.

몸이 떠오르고 있었다.


저 아래로 아득히 지구의 늑골 같은 사막의 구릉이 보이고 있었다. 너무나 가볍고 거칠 것이 없는 이 비상의 느낌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이제 우리는 균형을 잃으며 떨어지고 있었다. 균형을 잡기 위해 심하게 몸을 허우적거리며 나는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펼쳐라 새처럼. 생각을 버리고. 바람의 결을 읽어라.

바다로 선회해. 새처럼 사선으로…….  빌어먹을 자의식이라니.’

그리고는 갑자기 주변이 이상해 졌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긴가 민가 누가 다가오는 듯한 기척이 분명히 들렸기 때문이다.

벌떡 몸을 일으켰다. ‘후다닥’하며 무언가 급하게 도망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깜짝 놀라 일어섰다.

황망한 정신을 수습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의식이 드는 속도에 따라 가슴이 터질 듯 풀무질을 해댔다.

아무 것도 보이질 않는다. 모닥불이 꺼져 가고 있었다.



나는 긴장을 더하여 다시 주변을 차근차근 둘러보았다. 뭔가가 이상하다.

그때서야 나는 해면으로 고개를 내밀어 약하게 빛을 뿌리는 조각달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아닐 텐데?’ 나는 내게 랜턴이 있었음을 그제야 생각해 내고 급하게 그것을 찾았다. 그러나 그것은 모자와 함께 텐트 속에 넣었음으로 보이질 않았다. 나는 당황하고 있었다. 대체 뭐란 말인가? 나는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또다시 심한 공포감을 느끼며 휘둘릴 것 같은 다리를 옮겨 텐트 쪽으로 갔다. 다행인 것은 신발은 신고 있었다는 것이다. 형편없는 녀석. 신발마저 신지 않았다면 완전 무장해제 된 상태가 아닌가. 나는 랜턴을 찾아 주위부터 비추어 보았다. 아무것도 없다.


아래쪽 바다로 찬찬히 불빛을 돌리는 순간 나는 섬찟한 전율이 나도 모르게 온 몸을 훑고 지나가며, 차갑게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자세히 보니 그 바다에 온통, 약하지만 푸른 인광이 가득 차 요사스럽게 출렁이고 있는 게 아닌가.

도깨비불처럼…. 나는 주저앉고 싶었다.   


13. 그러나___. 물고기처럼 유영도 하고 뒤집기도 하며, 별처럼 반짝이고, 파도에 부서져 동그랗게 구르기도 하는 이것들은?...

그렇지 이건 예전에도 몇 번 본 경험이 있는 바다의 야광생물들 아닌가?

‘침착해라. 침착해.’

나는 자신을 향해 속으로 울부짖듯 소리쳤다.


그러나 한낮의 파도를 타고 한없이 밀려오던 그 흰 유령 같던 해파리 떼며, 낮에도 어두워 도무지 그 속내를 알 수 없었던 해식 동굴의 깊이가 자꾸 엉뚱한 환영으로 번질 즈음, 갑자기 저 뒤 산 쪽에서 '후다닥'하는 소리가 또다시 들렸다. 반사적으로 비추었다.

검은 짐승 두 마리가 바위 위로 뛰어 오르는 게 보였다.

‘아!’


허물어 질 것 같은 한숨이 나도 모르게 터져 나왔다. 분명할 것이다.

아까 낮에 산 위에서 보았던 토끼 똥 같은 배설물을 나는 생각해 내었다. 염소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랜 시간이 흘러 심하게 탈색되고, 풍화되어 별 생각 없이 지나쳤던 생각도 났다.

나는 기습하듯 다시 그 물체를 비추어 보았다. 약한 안광을 번뜩이며 재빨리 숲 속으로 숨는다.

뛰는 모습이나, 바위 위에 우두커니 서 있던 모습으로 보아 야생 상태가 다 된 염소임이 분명하다.

나는 주저앉았다. 숨을 고르고 한참 만에 일어서서 모닥불에 나무를 넣으며 나는 심하게 나를 책망하였다.


무인도에는 가끔 인근 주변 섬사람들이 염소를 자연 상태로 방목을 한다. 그리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모두 잡아들이는데, 이 염소란 놈들을 자연 상태로 두면, 이 섬 먹이사슬의 꼭지에 앉아 이 좋은 원시상태의 식생을 황폐시키고 - 마치 인간들처럼 - 습성은 거의 야생화 되어 자기들끼리 번식을 해 정확한 두수 파악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행동은 산양처럼 민첩해져 포획의 그물을 빠져 한두 마리 남게 되는 경우가 있다. 아마 그럴 것이리라. 나는 안도했다.

나는 심한 꿈을 꾸고 난 것처럼 아직도 정신이 어리벙벙하였다.

‘참 꿈도 꾸었었지.’

쓴웃음이 나왔다. 대가는 어떤 식으로든 치르게 되어 있는 것이다.


나는 한참을 그러고 앉아 있었다.

알코올이 다시 정신이 드는 것처럼 다시 그 힘을 발휘하려 한다. 모닥불에서 연기가 심하게 난다. 이 술이 깨기 전 정식으로 잠이나 자자. 나는 불붙지 않은 등걸들을 빼어내고 일어서서 심호흡을 크게 몇 번 하며 바다를 보았다. 여리고 창백한 달빛이 가늘게 그 바다 언저리로 스미고 있었다.  

‘웬 만월 꿈이라니.’

밤이슬이 내리고 있었다. 삼라만상은 온통 적요. 별빛마저 함초롬히 그 이슬로 눈꺼풀이 무거워 졸고, 천지간엔 가득한 적막. 적막뿐. 아무 것도 아닌 것이며 아무 일도 아닌 것이다. 그러니 내게 답할 성질의 것은 더더욱 아닌 것. 나는 침낭 속으로 들어가 누웠다. 그리고 쉽게 잠이 들지 않을 것 같은 느낌과는 달리 나는 곧 잠이 들었다.

 

 

'걷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쪽바다-2 (4~7)  (0) 2005.09.16
남쪽바다-3 (8~11)  (0) 2005.09.16
남쪽바다-5 (~)  (0) 2005.09.16
3월28일 생강나무-9(끝)  (0) 2005.09.14
3월28일 생강나무-7, 8  (0) 2005.0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