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3월28일 생강나무-2

우두망찰 2005. 9. 9. 13:03
 

2


정표 앞으로 가 초행길의 시간을 가늠해본다.

다섯 시가 다 된 시간. 안테나가 선 주봉 망경대까지는 이십분.

내게 익숙한 매봉까지는 오십분. 표지판에는 이리 나와 있다.

그러면 여섯시. 다시 하산 길. 오늘, 션찮은 왼쪽 무릎으로는

거기서 또 최소 한 시간. 아직은 짧은 해로 좀 무리스럽겠군.

그러나 눈앞에 빤히 보이는 저기가 설마 오십분이야 걸리려구.

이왕 내친걸음, 끝까지 가보지. 마음을 정하고 출발.


오가는 사람이 눈에 띠게 줄어있다.

그러나 주봉 정상 앞. 암벽을 의지해 바람을 피해 무리지어 핀 그

생강나무 꽃들이 너무도 선연해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래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란도란 얘기소리가 들린다.

‘이거 영 쑥스럽구만.’

아까 그 모녀커플이다.

그 길로 돌아내려갈 줄 알았더니, 아무리 개명천지. 아직은

햇빛이 남아있다지만 곧 어두워질 테고. 바람 일어 기온도

내려가는데 여자들끼리 너무 무모하군.

카메라를 배낭에 넣고....


이제는 내가 따르는 꼴이 되었다.

길이 외통수라 정상 암벽을 넘지 않을 수가 없다.

당연 앞에서는 미적대고

“무섭지 않으세요?”

미안한 듯 둘이서 말없이 비켜선다.

“내가 도와 드릴 테니 어서 넘어가십시다.”

그리하여 본의 아니게 외줄 밧줄이 놓인 그 바위를 손 내밀어

잡아주고 끌어주는 꼴이 되어 같이 정상에 올랐다.


역시 산의 정상은 뭔가 다른 풍미가 있다.         

높이차가 그리 나지 않지만 정상은 사방으로 일망무제

시야를 틔워 감춰진 이면, 안보인 사면들을 모두 드러낸다.

비로소 어떤 체증 같은 것이 내려앉는 느낌이고

‘오길 잘 했어.’ 생각도 절로 든다.


아직은 아무런 치장도 하지 않은 발아래 잡목수림이 아름답다.

서쪽으로 구름인지 안개인지, 아니면 먼지인지. 빛의 산란으로

벌써 아득한 황혼. 그 아래 희끄무레 바다도 보이는 것 같다.

빛난다. 그래 맞다. 바다. 바다도 보이는군.

망원렌즈로 확인하며 바람이 몹시 드세 윈드 재킷을 꺼내 입는다.

처음 올라왔을 땐 몇 사람이 있었는데 얼핏 보니 어느새 정상엔 

그 모녀커플과 나뿐이다.


시…?”


간식거리라도 꺼내 그들과 잠시 나눠야겠다 생각하고 배낭을 뒤지는데.

순간적으로 다시 눈길이 스쳤다.

그러나 이번엔 천천히, 서로 탐색하듯이 시간을 두고.

“아!”

누구랄 것도 없이 짧은 탄성이 동시에 터졌다.


“누구?” “그래 누구”

살다보니 세상에 이런 일도 있구나.

우리는 잠시 어쩔 줄 몰라 했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 무리해서 따라와 봤어.”

언뜻 이슬이 맺히는 것도 같다.


“그렇구나. 너였구나. 그래 나도 왠지 긴가민가했어.”

.

.

“자, 지금 너무 늦었으니 우리 내려가며 얘기하자.”

계절이 춘분을 지나서인지, 해도 그런대로 잘 버텨주어

우리는 별 불편 없이 산을 내려올 수가 있었다.


디선가 만나겠지. 평생을 두고 한번이야 만나지 않으려고.’

한때 나는 이런 막연한 생각에 밑도 끝도 없이 빠졌던 적이 있다.

바로 그녀를 두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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