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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1

우두망찰 2005. 8. 2. 16:37
오후 네 시가 다 되어서 길을 나서기로 한다.

오전부터 계속 미적이다가, 딴 짓으로 꾸물대다가

갈까 말까 망설이기를 수차례.

결국 길을 나서기로 한다.


내일 아침 그냥 빠른 교통편으로 후딱 갔다 올수도 있지만

시간도, 경비도 더 들고, 몸도 피곤한 우매한 이 짓거리.

날도 저물고 흐린데 길을 나서기로 한다.


양재 고속도로 초입. 세븐 세그먼트 시간이 네 시 반이다.

차량, 막힘없이 잘 흐른다.

운전석에 깊숙이 자리를 파묻고 라디오 볼륨을 맞춘다.

비로소 안정을 찾고...

그래, 너무 오래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었어.


대전을 지나기까지야 너무 익숙한 풍경이니 그저 마음속

생각의 흐름에 맞추어 흘러가면 되었고

금산 지나 무주. 멀리, 갑자기 솟아오르는 듯한 산 하나와 만난다.

지금부터다.

여기서부터 지리산 뒤쪽 산청까지. 차의 속도를 일정하게 유지하고

산으로, 산의 마음속으로 지나는 거다.

도로는 붐비지 않고 늘 한가롭게 비어있으니 여유롭고 넉넉하게.

서둘지 않는 마음 하나면 충분하다.

그러니 그 품에도 잠시 들어봐야겠지.

덕유산 휴게소에 이른 시간이 여섯시 반.

규정 속도를 크게 벗어나지 않고도 채 두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니

순조로웠지. 잠시 쉬기로 한다.


빗방울 한둘 긋기 시작하고.

텅 빈 식당에서 혼자 저녁을 먹는다.

이 빛이 사라지기전 수려한 이 구간을 지나야 하리.

덕유산 휴게소에서 덕유산이 잘 조망되지 않는다는 이 사실은

또 어떻게 설명되어야 할지.

그 수많은 산천장관들을 거부하고 그냥 평범한 경치 속에 들어앉아 있다.

 

무. 진. 장. 눈이 무진장 많이 온다는 무주, 진안, 장수를

지나며 언젠가 새해 해맞이를 남쪽으로 가며 보라보던 산 정상의

시리도록 푸른 하늘, 하얀 눈꽃들의 이국적 아름다움이 생각나지만

오늘,

산들은 하얀 구름 모자를 두텁게 눌러쓰고 진녹색 검은빛으로

그냥 무겁게 둘러 앉아있다.

다시 이 빛이 사라지기전 지리산자락으로 들어야해.


를 높이고. 그러나 굽이굽이 육십령 고개를 터널하나로

단숨에 넘었지만 이제 빗줄기가 굵어져 주변 풍광들은 벌써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남은 건 전조등 불빛에 갇힌 작은 공간.

지금부터 진주 사천까지는 완만한 계속 내리막길이다.

길을 자주 다니다보면 땅의 굴곡이 자연스레 몸으로 스며들 때가 있다.

태백의 영서면을 내려오며 고개를 몇 번 넘더라도 그 내림기울기를

누구나 느끼는 것처럼.


방송주파수가 맞질 않는다. 끈다. 단속적 기계음.

누구를 생각할까? 무엇을 생각할까?

그런 거야 아무래도 좋겠지.

이 홀로인 공간, 이 상황이 그리 그리워, 못 잊어 출발한거 아니었어?

그러니 즐기라구. 원 없이.

함안, 산청. 날도 저물고. 빗길. 급할 것 없지. 천천히. 천천히.

팔팔 고속도로. 새로 지은 국도보다 느린 2차선 저속도로.

그래 한적한 길. 그래 길섶 야생화가 지천인 길. 거창서

무주로 넘어가는 그 가파른 산길의 풍광은 또 어떻고. 

산청휴게소를 들려 중간보고를 한다.

“잘 있지? 잘 가고 있어. 그럼, 걱정하지 말라구.”


아내는 항상 내게 관대하다. 우호적이고 협조적이기도 하다.

그녀, 일찍부터 자기와 나의 다른 점을 인정하고 수용해준다.

그녀, 길나서기를 즐기는 편이 아니다. 하루만 지나도 피곤해하고

머리 아파한다. 그러나 ‘언젠가는 따라나설 거야’ 이리 말하다가도

갔다 오면 녹초가 되어 ‘나는 집이 편해’ 이런 말하며 안심하고 안정한다.

항상 집안에서, 아이들 옆에서, 이웃들과 사소한 교류에서

즐거움을 느끼고 보람을 찾는-그러나 대단히 쾌활하고 유쾌하며

활동적이기도 한, 나와는 좀 상반되는 성향의 사람이다.

‘당신, 길에서 누가 당신을 잡아당기는 것 같아.’


가끔 그녀가 내게 하는 불평이다. 그러나 언제나 내가 길을 나설 때면

이해해주고 별말 없이 동의해주고 걱정해주고 준비물도 챙겨준다.

그의 영혼에 평화 있으라.  


바람결을 만져본다. 바다에 나갈 때면 나는 항상 여기서 쉬며

바람결을 가늠해본다. 나뭇잎의 움직임으로 그 바람의 세기로

내일 바닷가 기상이 어떠할지, 배는, 조행길은 순탄할지....

그러나 지금은 그와는 상관없으니 아무려면 어떠리요만

그래도 습관처럼 바람결을 가늠해본다.

그리고 트렁크에 뭣 하나도 숨기듯 예비해 가지고 간다.

마치 오래된 습관처럼. 꼭 하겠다는 생각도 없으면서.


낮이라면 지리산자락에서 흘러드는 여러 지천들과

주변 산들의 푸르름이 그야말로 산자수명(山紫水明)이겠지만

지금은 어둠뿐. 시속 백 키로.

그저 전방만 주시하면 된다.


진주, 항상 지나다니기만 하고 아직 시가지에 들른 적이 없다.

지인에게 연락이나 한번 해볼까?

아서라 밤도 늦은데, 전번도 모르는데...

그런데 한번도 본적이 없는데 어색함이나 주저함이 별로

생기지 않으니 이건 또 무슨 조화인지?

글로 맺은, 글이 주는 마력 친화력 때문이리라

 

사천공항을 지나 죄 회전. 고성으로 가는 2차선 좁은 국도.

몇 년째 확장 공사 중이어 항상 시간은 이 구간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밖은 빗줄기가 굵어지고 칠흑 같은 어둠이다.

아차차, 이거 뭐야 갑자기 시골 논두렁길이 나타나네.

안내판이 망실되어 길을 잘못 들었다. 백. 턴.

그런데 뒤가 잘 보이지 않는다.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차를 멈추고 창문을 내린다.

빗방울.

빗 내음과 함께 싱그런 풀 내금새. 이건 대단히 정겨운, 향토색 짙은 말. 

개구리 울음소리도 따라들지만 잠시 심호흡으로 창문을 올린다.

구신도 따라 들까봐.


저쪽 도로에 띄엄띄엄 자동차 불빛이 보인다. 다시 합류.

공사 중이어 제한속도 표지가 30이다. 고성. 오광대탈춤.

그 고성을 우회해 드뎌 마산에서 내려오는 4차선 간선국도

14번 도로와 만난다.

여기서 다시 최종목적지까지는 서둘러도 시간 반은 조히 걸린다.

낮이면 좌측으로 바다가 드문드문 나타나는 그런 심심찮은 길.

그러나 갑자기 모든 게 심드렁해진다.

이 캄캄한 밤중에 허위허위 달려가는 이유가 뭐지?

누가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피곤기로 여행의 감흥도 이제 많이 사라지고

사방은 칠흑 같은 어둠.

비도 오는데.


돛폭을 접은 요트한척을 지붕으로 인 학섬 휴게소.

하마터면 지나칠 뻔했다.

사람도 없고, 차량도, 비가 추적이니 당연히 바다도 없고.

라디오주파수를 맞춘다.

의자를 뒤로 눕히고 잠시 눈을 감는다.

열시, 파란 불빛이 시간을 애기한다.

적막하다. 쓸쓸하다. 외롭다.

그래, 마음에 든다.

즐기라구. 신물 나도록.

누구에게든 간절하게 전화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러나 띄엄띄엄 중간중간 끊어지며 이어지던 독백

잉게보르그 바하만. 말리나, 맨하탄의 선신 이런 것들이

뜬금없이 생각나고...


‘통영이나 들려야겠어.’

거기서 자고 내일 아침 일찍, 음~ 좋은 생각이야.

스스로 기특해하며 통영시가지로 든다.

불빛이 환한 통영대교 다리를 지나 부두에 이르지만

조용하고 깔끔한 숙소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온통 술집, 음식점들. 그러나 한가하다.

다시 돌아 해안도로를 무작정 따라가니 풍경이 점점 깊어진다.

굽이진 언덕길이 나오고 바다건너편 불빛도, 잎 두터운 상록활엽

가로수도 정취를 더 하는데 길은 무한정 이어진다.

비, 잠시 주춤해 있다. 건너편 불빛이 요염하다.

에이, 갈 때까지 가보지 뭐.


그런데 점점 점입가경이다.

산모롱이를 돌때마다 좌측으로 계속 어선과 낚싯배들이 가득한

포구인데, 이정표로는 달아 공원 십 몇 키로.

시골 면소재지를 지나는가 보다.

길이 외통수 길이어 계속가다 할 수없이 돌아 나오기로 한다.

이 길로 끝까지 가면 바다. 그 이후로 낭떠러지.

끝이다.

이 시간, 이 나이에 끝에 설수야 없지. ^^


그래 돌아 나오며 구경 한번 잘했다 생각한다.

시가지 전체가 조망되는 언덕길에 잠시 멈추어

도시 불빛과 밤바다를 잠시 내려다본다.

바람이 불고 빗방울은 성기다

차분하고 말갛다. 불빛이 선명하니 모든 게 검은빛으로 반짝인다.


시청 옆을 지나며 비로소 무수한 숙소불빛들.

그러나 여기서 잘 바에야 길 옆, 한갓진 모텔이 나을 수도 있겠지.

한 시간 이상을 보내고야 거제로 든다.

길은 뻥 뚫려 무인지경인데 비, 다시 내린다.

온통 뻘건 네온으로 장식한 길옆 숙소 몇 개를 못 본 척 지나친다.

할 수 없다. 자정이 넘었다. 다음 만나는 집에 무조건 투숙키로 마음먹는다.


주차장에 차를 들이미니 이건 또 웬일? 주차할 공간이 없다.

빼곡하다. 이런 야심한 밤에, 인적 드문 시골길에.

방이 있을까 은근히 걱정하며 안내 실을 두드리니 부스스

안주인 얼굴이, 2층 계단에서 바깥주인 얼굴이 동시에 나타난다.

다행히 방이 있다. 벌써 휴가철인가?

아니면 나처럼 가는 길을 중간에 접고 든 걸까? 알 수 없다.

하지만 방이 이외로 깨끗하다. 정돈도 차분히 잘 되어있다.

마음에 든다. 샤워를 하고 잠이 들다.


아침, 일어나 커튼을 젖히니 이외로 눈앞에 바다가 바로 누워있다.

어제는 천지사방 분간이 안가는 물먹은 어둠이어 미쳐 못 보았던가 보다.

그 바다다.

 



.


그러나 나그네의 심사야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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