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기

수련

우두망찰 2005. 7. 15. 20:42
 

수련          -채호기



내가 ‘수련’ 하고 외치면

수련, 너는 듣느냐? 들리느냐?

그렇지 않다면 무엇이 증명해줄 것인가

내가 너를 부르고 있다는 것을


저 떨리는 물과 보이지 않는 공기와

공기를 뚫고 지나 떨리는 물에 가 닿아 폭발하는 햇빛

들은 아는가? 나의 외침이

수련, 너를 부르는 소리라는 것을


나의 외침은 네가 들음으로써 완성되는 것

내가 말을 입 밖으로 토해내는 순간

그것은 공기 중에 흩어져 사라져버린다.

수련, 네가 그것을 들을 수 없으니까

그것은 더 이상 말이 아니다.

벙긋거리는 물고기 입만 볼 수 있을 뿐

그들의 말을 들을 수 없는 것처럼


그 여름날, 내가 너를 처음 본 순간

깨달았어야 했다, 너를 사랑하기 전에.

나는 흙을 딛고 서 있고

수련, 너는 물을 딛고 서 있다는 사실을


그러나 너의 아름다움은

더 이상 나를 숨쉬지 못하게 하고

아름다움을 부르는 외침도 멎어 여름날의

물과 공기의 정적 속에 모든 것은 정지되고 말 것이니

탄소 동화 작용하며 숨쉬는 너의 숨결

한가운데서 내 숨은 꺼져갈지도 모른다.


수련, 너를 사랑하는 나의 간절한 외침이

식물의 고요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린다면

이제, 너의 아름다움이 너를

불러 깨어나게 할 것인가?


*

나는 너를 부르는 간절한 힘으로

너를 쓴다. 내 말을 네가 듣지 못하는 것처럼

검은 글자들은 너를 표현해내지 못할 것이니

‘수련’이라고 쓴다고

어느 누가 너의 아름다움을 읽겠느냐.


그 여름날 네가 나를 발견했을 때

나는 너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네 말을 받아 적으려했지만

글자로는 불가능하여 그 하얀 목소리를

바라보기만 했었다.


너의 가느다란 녹색 줄기에서

어떻게 그토록 아름다운 목청이 쏟아지는지

수양버들은 하염없이 네게로

축축 늘어지기만 했고

햇빛은 소리에 닿는 순간 뜨겁게 타올랐다.

공기는 그 소리에 흥건히 젖어

돌아다니며 모든 다른 사물들을 애무했으니


그 화려한 흥분의 현장에서

나는 돌보다 더 무겁게 가라앉고

증발하는 물보다 더 뜨겁게 떠올랐다.


*

내가 너를 처음 봤을 때

어떤 강렬한 빛을 본 뒤

눈을 감아도 망막에 어른거리는 잔상처럼

너는 닫혀진 내 몸 안에

하얗게 떠돌아다녔다.


‘수련’이란 글자를 아는 것은

너를 아는 것이 아니다.

‘6월과 8월에 걸쳐 꽃이 피는

수련과의 다년생 수생 식물’이라는 지도가

너에게 다가가는 길을 알려주지 않는다.

처음부터 너는 알 수 없는 그 무엇이었다.


내 시선이 너를 만지고 있고

너의 시선이 내 몸을 구석구석

밝히고 있어도

너는 연못 가운데 떠 있고

연못은 나를 삼키고 말 바닥없는 깊이이니

내가 모르는 그 깊이에서부터

너는 흰 꽃잎들을 분만한다.

너의 얼굴 아래 물속에 잠긴

그 육체를 나는 영원히 바라볼 수도 없다. 


나를 그토록 매혹시키는 것은

수련, 물 바깥세상에는 없는 너의

육체인지도 모르겠다.

수련, 너의 매혹적인 육체는

이 세상에는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 그 어떤 사물도 아닌

백지 위에 씌어지는 글자와 같은 것이니


누가 ‘수련’ 이라고 쓴들

하얀 바탕 위에 검은 흔적,

누가 그것을 너의 육체라고 하겠는가.

검은 물 위에 발광체처럼 하얀 흔적

처음부터 너는 알 수 없는 그 무엇이었다.


*

‘수련’은 백지에 가로 세로 그은 흔적.

상처에선 피도 흐르지 않고

잉크는 금방 말라붙어 종이에서 떨어지지도 않는다.

튀어나온 날카로운 끝이 매끈한 표면을 긁은 자국처럼

‘수련’은 건조한 종이에 바짝 말라붙어 있는 셈이다.

종이 밑으론 물이 흐르지 않고

책상의 딱딱한 면이 떠받치고 있을 뿐이다.

종이를 들고 봐도 종이뒷면에 투영되는

상처 같은 검은 ‘련수’의 흔적.


‘수련’은 어긋나는 작은 직선들의 건조한 검은 흔적.

그 흔적은 지워지지 않는다.

당신이 그걸 볼 때 그것은 끊임없이

고정된 채 그치지 않고 그곳에 있다.

종이와 검은 흔적은 서로 여태껏 아무런

교신이 없다. 그것은 가볍게 마른 채

하얀 종이에 머물러 있다. 그저 건조하게 있을 뿐이다. 


당신이 그걸 읽는 순간 놀랍게도

그것은 연못위에 하얗게 피어있다.

여름날의 햇빛에 벗은 피부를 노출한 채

기름처럼 부드럽게 빛나는 검푸른 물에 나긋나긋한 알몸을 담그고

깨진 태양처럼 눈을 찔러오는 흰 수련의 무리들.

풍만한 수양버들의 머리카락처럼 흘러내리는 기름진 그늘이

연못의 한쪽을 축축하게 적시는 넉넉한 오후.

수련의 한 무리는 그 그늘에 젖어 평화롭게 일렁이고

한 무리는 조용한 물속에 드러누워

젖꼭지처럼 붉어져오는 꽃술을 손가락으로 살짝 가린 채

물 위로 대담하게 젖은 젖가슴을 내민다.


투명하도록 얇은 피부 밑으로 터져 흐를 듯

물기를 흠뻑 머금은 하얀 수련.

그러나 수련은 여기 없다, 이 백지에


건조한 검은 흔적만이 끈질기게 있을 뿐

당신은 ‘수련’이란 언어를 타고

건조한 검은 흔적과 흰 수련 사이를

메아리처럼 방황하는 중이다.


당신은 지금 이 순간 어디에 있는가?


*

너무나 분명해서 부인할 수 없는 사실:

수련, 너를 백지위에 옮기려면

너를 죽여야만 한다.


너를 내 시선의 밝은 빛 속에

아름답게 가둘 수 있는 것은

겨우 사흘뿐 - 세 번의 밤에

세 번 꽃봉오리를 닫는 순간

너는 사라지고 말 것이기에


백지 위 ‘수련’이란 글자로부터

너는 영원히 살아날 것이다.

     그게 너냐? 백지 위에 핀 글자!

그러나, 지금 눈앞의 흰 수련

바람과 햇빛과 물의 살결 위에

부드러운 손처럼 놓인 흰 수련

     그게 너냐? 수련!


수련, 너는 햇빛 가운데서 글자의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나는 너의 흰 꽃잎들이 푸른 물위로 한없이 추락하는

그 순간의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한여름 - 계절의 한창 때,

한낮의 꽃인 수련이여!

꿈의 베일처럼 너의 나체를 가리고 있는

수련이여!


너를 갖기 위해선

글자의 무덤을 파헤쳐야 한다.     





******************

이상은 채호기란 시인의 수련이란 연작시 중

하나의 수련 전문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아침, 새벽. 한낮. 밤중

어디서 그런 문자 속을 비집고 시시각각, 제가끔의

특이한 모습의 수련을 피워내는지

수련 하나만 가지고 시집한권을 전부 채우는 그의 공력에

그만 할 말 잃고 질려, 아, 시인은 타고나는 갑다.

그리고 뭘 하나 하려면 이 정도 준비, 공부, 철저한 노력이 있어야 하며

잠시 참담했던 기억도 납니다. 


내일은 해가 뜰지? 어떨지

종일을 떠돌다 밤 늦게 들어와

휴일지킴이로 이 수련 하나 꿔다놓고 갑니다.


즐건 주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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