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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산지 얘기

우두망찰 2005. 7. 11. 18:23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장마비가 근 보름 질척거리니 꿉꿈하기도 하려니와

콧구멍에 새바람 들이고 싶어 몸이 먼저 반응하니

아숩지만 지난 이맘때 다녀온 주산지 영화얘기나 해볼까

너나없이 울궈먹어 좀은 식상하시겠지만^^) 

 



김 기덕

글쎄 참, 이 이름을 두고 그는 잠시 막막하다.

‘봄-업. 여름-욕망. 가을-분노. 겨울-빔(空). 그리고 봄-윤회’

넷 상에 떠도는 권두어 처럼 이 말을 차용할까


아니면 책으로 다시 묶은 영화에서 그의 변처럼

‘다섯 단락 이야기 속에 순수 속의 잔인함, 욕망 속의 집착,

살의 속의 고통, 번뇌 속의 해탈이 담겨 있습니다.’

이 말을 빌릴까


그는 이 영화를 보았다.

또한 그는 그가 만든 영화 열 편 중 ‘사마리아’ 란 영화도 보았다.

비교적 그의 후기에 속하는, 순화되었다는 작품들로 ‘로카르노’

‘베를린’ 같은 영화제에서 비평가상, 감독상 등을 받았다 한다.

그런데 위에 열거한 함축적 저 평들….

또한 현학적 수사들로 가득한 영화전문가 평론들….

그래, 그도 느낌이 있으니 나름으로 한번 정리해볼까?

이 영화의 무대가 된 저수지에 왔으니


1) 인과응보 

2) 업 

3) 윤회.


첫째 인과응보

이는 너무나 당연하다. 어린 동자승이, 아직 선악 분별도 모호할 것이 분명한

어린 동자승이 피라미, 뱀, 개구리를 잡아 장난삼아 그들 몸에 무거운 돌멩이를 단다.

그래서 그중 두 마리는 죽고

앉아서도 천리를 보아야 당연한 노선사의 예언?처럼 영화를 끌고 가는

들어난 표면적 모티브다. 그러나...

삶이 그렇듯, 사회 질서가 요구하듯, 이는 너무나 당연한 귀결.

우리 인간들에겐 작은 벌레하나, 생명하나 죽이면 안 된다는 앎이 애초부터 있었던가?


아니다.

그래서 장면 1에서처럼 까닭모를 울음을 우리는 운다.

그래서 두 번째. 업業이다. 인과응보가 아닌 업이 된다.

인간의 의지나 행위로 어쩔 수 없는, 씻을 수 없는, 기독교 원죄에

해당하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벗어날 수 없는 인간된 굴레의 한계.

 

 



그런데도

우리의 청춘, 봄여름은 그렇든가? 아니다.

얼마나 빛나며 자랑스러운가.

얼마나 싱그러우며 아름다운가.

얼마나 맹목적이고 간절한가. 아니 뜨거운가.

장면 2에서처럼 사랑은 비가 오면 새는 대바구니라도 그 사랑에 씌워주고 싶다.

그리고 그 열정을 누가 당하리.

부처님 앞에서건 밤낮이든 그 눈길, 쏠리는 마음을 거둘 수 없다.

그러니 당연히 장면3 가을로 넘어가야지

배신의 분노. 불평등의 인간사. 이 사회, 생명가진 것의 본성은

가진 것을 추구하고 능력 있음을 좋아하고 아름다움에 관대하다.

그러나 그렇던가?

부와 능력과 미는 공평하든가? 공평히 주어지든가?

하물며 이것들, 상대적 속성임에랴.

그러나 과연 배신 때문인가? 혹시 자신 때문은 아닌가?

 

 



자신의 한계. 인간의 한계. 욕망과 좌절.

잘해보고 싶었는데. 잘해주고 싶었는데.

정말 잘하고 싶었는데…….


죄를 지었으니 당연 벌을 받아야지.

욕망에 충실했으니 그 스러짐의 허무를 감당해야지.

그런데 과연 그 업보의 사슬을 끊을 수 있을까?

체화되지 못한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선사는 참 선사스럽게도

산(生 )고양이 꼬리 붓으로 쓰고

당자는 그 죄업의 칼날로 밤새 그 글자들을 마루마당에 새긴다.

사회가 임명한 집행자는 원색의 천연염료로 그 글자를 단청하듯

채색하고. 끝났다. 벌 받을 준비. 가슴에 새겼겠지?

이제 죄 값을 받을 준비를 마쳤다.

그래서 그는 떠나고

 

 



세상 비밀을 다 알고 있어야 하는 선사는 신선이 되지 않고

때가 되니 스스로 다비식으로 스스로의 육신을 거둔다.

단 하나의 소통수단, 배위에 장작을 차리고.


맞아. 이 선사 정직해. 신선이 되지 않고, 부처가 되지 않고

익은 볍씨처럼 고개 숙이고 만추의 땅으로 스미니.

할 바를 다한 자연. .  닮아 도통했구나. (도통이 별거든가?)


한차례 열병이 지나면 이어 고요가 찾아오는 법.

그가 그 질풍노도의 시대를 보내고, 그 죄의 값?을 치루고

이미 반 탈속하여 이 버려진 수상암자로 돌아온다. 겨울그림자처럼 스며든다.

아무것도 없다.

그 불타던 가을 홍엽, 지글거리든 여름 홍염, 눈부시게 푸르든 봄 새닢도.

온통 회색. 세상이 모두 얼어 회색 얼음.

배가 필요 없으니 걸어 들어올 수 있다.

 

 



스승의 사리를 찾아 거두고 그는 그 겨울, 겨울과 같은 수련에 들어간다.

감춰진 비급을 찾아 케케묵은 먼지를 털어 익힌다.

-그런데 세상엔 감춰진 비급이 있어야 말이지.

산다는 일이 감춰진 비급 하나쯤 있다면 얼마나 신나랴만,

그 추운겨울 위통 벗어 저치고

미끄러운 얼음판위에 중심잡고 다리 찢기, 다리 들어 귀에 대기


상단 막고 중단지르기 중단 막고 상단차기…….

얼마나 힘들까? 그런데 이 친구 잘 하네. 보통 아니다.

(이건 이 영화를 만든 감독 자신이 직접 연기했다.) 이 친구 멋지다.

갑자기 무공이라니. 절정고수라니. 이 만화 같은 이외성이 얼마나 신선한가?

제멋대로 돌쇠 닮은 그 투박함과 무뚝뚝도 영화판에 신선한데

벗으니 그 몸매 더구나 이소룡 닮았구나? 그래서 이 부분,

그의 평소 몸매 가꾸기 열심에 다시 한번 박수를 보낸다.

그래 마자. 아무리 면벽하고 염불 왼들 부처될 리 만무하고

아무리 눈감고 기도해봐야 세상은 터럭만큼도 움직이질 않으니.

세상의 반의 진리는 몸에서, 생각 밖에서, 벌건 대낮에 눈 뜨고 있는 법 

이 친구 밥 철학 몸 철학 똥 철학을 이미 아는군. 쭈~아.

이건 또 뭣꼬?

맷돌 하나 꽁무니에 달고 목불 하나 등에 지고 강원도

깡촌 무지막지 산을 그냥 냅다 다짜고짜 신법으로 오른다.

엎어지고 넘어지고 찢어지고 까지며

여기서 고행의 수도승 히말라야 설산 오르듯 한 시타일리쉬한 세련은 없다.

비유, 은유, 환유, 제유, 대비, 상징 따위 깡그리 무시한다. 대신

김 영임의 ‘강원도 아리랑’ ( ‘회심곡’이든가? 가물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흐른다. (끝나면 산 정상에 도착한다.)

이 영화의 압권이다. 이 장면에 딱이다. 엄청 세련되었다.

너무나 수가 뻔히 보이는 내놓고 하는 얘기. 산은 산, 물은 물,

책상은 책상이라 정색하고 얘기. 애(哀)오(惡)욕(慾) 뚱땅 뚱땅 정직한

이 음악 없이도 가능했을까?

길 없는 길. 당도한 정상 겨울. 해 지는 황혼은 영하 30도다.

그 추위에 결가부좌하다.


그래서 어쨌느냐구?

 

 



추웠겠지.

어느 날 미이라, 머미처럼 온통 천으로 얼굴을 감싼 여인네 하나

늦은 밤 암자로 찾아오는데, 갓난아기 하나 안고 찾아오는데….

-나는 그 봄 날 새뜻한 그 여자아인 줄 알았다.

시나리오는 그렇지 않더라도 어쩌다 질긴 목숨 건져, 그의 씨앗하나 잉태해.

이가 상징함은 봄의 욕망. 결국은 반쪽을 배신한 욕망. 간음의 주홍글씨처럼

세상에 버림받고 세파에 시달리다 스스로 양심에 문둥이처럼 천형을 친.

(성경의 예수님 말씀이 생각나는데 ‘누가 이 여인을 돌로 칠 수 있으리.’) 

이야 예전 그의 어머니도 그랬을 터. 그의 운명도 그랬을 터.

그만 헛디뎌 얼음구멍으로 빠지는구나.

손 내밀어야 잡히는 건 (잡히지 않는 건) 미끄런 빙판.

소리쳐야 들리지 않는 차가운 빙벽의 단절

하늘은 바로 코앞인데 가쁜 숨 한번 허락하지 않는 얼음 밑 지옥이로구나.

지은 죄 얼마인지 눈도 못 감고 투명히 시려 멈추는구나.

그러고도 그 얼굴수건 안 벗는구나. 이 친구도 안 벗기는구나.

 

다시 봄

다시 그 장소. 다시 그 동자 승.

(한 세대가 돌았건만 영화는 똑같은 배우에게 똑같은 역을 맡겨

아예 내놓고 직설화법으로 얘기한다.)

각고의 시련 수련 회심 뉘우침 깨달음을 이뤘건만 천만에.


그건 그의 일.


한 치의 어긋남 없이 그 아이 또 개구리 피라미 뱀의 생명을 갖고

장난스레 살생의 업을 짓는구나.

너무나 봄 아름다운데. 천연덕스러운데. 무심한데. 짓 푸른데

그 동자승 얼굴 해맑구나. 천진난만하구나. 그늘하나 없구나.  

 

 



*

그래서 윤횐가? 그럴까?

아니다.

그렇다면 이리 장황히 얘기할 필요 없겠지.

그건 바로 인간의 운명, 한계, 현실을 얘기한 것.

지식은 세습되지 않고, 앎은 이어지지 않으며, 깨달음은 유전되지 않는다.

역사는 진보하지 않으며(*1) 이성 또한 진보하지 않는다. (*2)

신의 죽음에 (*3)이어 인간의 죽음이 뒤를 따랐다.(*4)

누구나 시작은 처음이다. 누구나 처음은 백지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그래서 업이다. 그래서 세상은 공평하다. 역설적이지만

그러므로 희망을 가져라?


(그 선사 왜 말리지 않고 알려주지 않고 가르치지 않고 교화하지 않았을까?)


이 영화에서 해탈이란 없다. 현실에도 그렇듯

구원도 희망의 메시지도 없다.

(있다면 그건 거짓, 있다 한다면 그건 사기.)

이 영화의 그물은 촘촘하지 않다. 성 굵다. 거칠고 무뚝뚝하다

무식하리만치 단순하고 나긋나긋하지 않고 친절하지 않다. 설명이 없다.

너는 너 나는 나. 안되는 건 안 되는 것.

왜? 글쎄 원래 그러니까.

이리 답할 수밖에 없다.

 



그는 목에 힘 빼고 잠시 휴식으로 쉬어가듯 이 영화를 만들었다 한다.

기법 상으로야 감독으로서는 아쉬움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 그래서 작품이 되지 않았을지?

알 수 없지만. 

이 영화는 불교적이지 않다. 다만 불교란 배를 빌었을 뿐.

(오히려 반 불교, 아니 반종교적이다. -그래서 인간적(철학적)이다.) 

또한 이 영화는 섣불리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정의하지도 않고 교훈적 이려 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쉽게 용서하지 않는다.

그래서 값싼 위안, 화해의 제스처는 없다.


그의 영화가 다? 그런 것처럼 섬뜩하리 만치 사실적 -그래서 자연적이다.

그래서 비위가 약한 이들은 그의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하지 않을 뿐 아니라 ‘에그머니’ 피하기도 하며

사람이 뭐 저래, 원래 저래 생겨먹은 종잔가? 적대적이기도 하다.


(이 영화 미국에 오만달러에 수출되어 백만 달러 넘게 벌어 추가 러닝

개런티도 받고, 청룡영화제 작품상, 아카데미 외국 언어 영화 한국 출품작,

뉴질랜드 영화제 두 팩키지 동시 선정 작, 미국수출 한국영화 중 최다관객

동원신기록도 세웠다 한다. - 한 마디로 한번 보라는 야근데.. 다 보셨네^^.)  


*

그런데 정말 이 세상에 구원이란 없는 걸까?

글쎄,

있을 것도 같은데.

맞아. 바로 그것. 바로 









당신.


서로 돕고 이해하고 사랑하고 협조하라.

내세가 아닌 이 현세를 위해

하느님 아닌 당신자신을 위해

그럼에도 불구

일하고 노력하고 배우고 선(善)하라.

뭇 생명, 있다가 사라지는 모든 존재들을 위해

같은 반열로 존중하고 사랑하며.

죽음. 어차피 이후는 당신의 영역 아니

잘 보이려하지 말고, 두려워 말고

하느님은 (있다면) 결코 그리 옹졸하지 않다.


(사실, 이리 말하면 이 영화의 뜻에 반(反)한다.

영화가 말하는 메시지는 이리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蛇足

*1 레비 스트로스 (야생의 사고 -원시인과 현대인의 논리성, 이성을 비교로 증명)

*2 미쉘 푸코 ( 본문 중 *4 이후 두 줄 문장으로 대신)

*3 니체 (신의 죽음-종교적 구원의 종말)

*4 자끄 라깡 (인간의 죽음-인도주의의 실종)


*4 인간의 죽음이란, 아우슈비츠 이후를 말함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으로

인간 본성적인 면 외, 자본의 속성, 무한한 탐욕성이 무국적 익명성으로

가려져 누구도 통제 불가능하게 된 현 세계화 -글로벌리즘의 폐해가 잘

증명하며, 대표적 사례로 우리의 IMF.

상대적 약자가 항상 그 피해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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