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기

모과처럼

우두망찰 2005. 11. 18. 12:04
 

전화벨소리.

세 번째 전화에서 일어났다.“알았어. 이제 일어났어.”

샤워를 하고 집을 나선다. 여섯시.

계절은 끝없이 추락하여 아직 한밤중.

'커피를 한잔하면 좋겠는걸.’하품을 삼키는데

집에서 가져나온 찹쌀떡 두개도 오도마니 옆자리서 그를 지켜보고 있다.

다시 전화음. "조심할게. 이제 자.”

집에 돌아온 모양이다. 그러니 서로 교대한 셈.

특별할 것 없이 이제 몸에 밴 익숙한 행사인데도 무슨 생각에서인지

그는 아내가 새벽기도를 가는 세시쯤에서야 잠이 들었었다.


여명. 미명. 박명.

순서가 어떻게 되는지 모르지만. 동녘하늘이 어느새 불그레하다.

곧 이어 어렴풋 시야도 따라 들고. 맑은 아침.

안개는 없다. 날씨가 차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이래선 안 된다. 몇 번을 깜박이다 털 듯

도리질을 하고 그는 휴게소에 들어 곧바로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10분 남짓 짧은 잠. 그의 특기.

아무데서나, 아무 때나 필요할 때 잠자기.

억지로 애쓰지 말고, 잠 올 때 잠자기 잠 안 올 때 잠 안자기.

비로소 개운하다. 커피 한잔을 마시며 시간을 본다.

'조금 늦은걸.’찹쌀떡 한입을 베어 문다.


그가 고향, 고개 마루를 넘으며 전화를 하니 벌써 첫 묘소를 마치고

다른 등성이로 이동중이란다. 엇갈리며 모두가 떠난 묘소를 혼자 찾는다.

어느 해는 너무 일찍 도착해 그 폐사지 은행나무 아래서 잎보다 노랗고

투명한 아침볕을 쪼이며 기다리기도 했는데...

부복한다. 가을 풀, 건초향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든다.

아! 할아버지가 반기시는구나. 기분이 좋다. 아침 첫 풀 향기는 그만큼 짙었다.  


이 할아버지는 평생을 자식을 두지 않고 할머니와 두 분이 사셨단다.

그 시절 배태 못하는 아내를 두고 첩실을 얻어도 그리 흉되지 않을

시절이었음에도 그러지 않았음은 유난히 부부애가 깊었다는 반증이라고도 했고.

그래서 돌아가시자 아버지가 양자로 입적해 제사를 모시게 되었다는데...


소래 할배. 그가 만난적은 없는 분이시다.

이렇게 아침 아홉시에 시작된 제례가 대부분 절차를 생략했음에도

산을 한바퀴 돌아 오후 네 시가 넘어서 끝이났다.

이십여기. 마지막 살아생전 그와 절친했던 한 젊고 애통한 죽음 앞에

엎드릴 때는 고라니 두 마리가 바로 뒷 등성을 타고 넘었다.

녀석들. 벌초 때는 바로 5미터 앞에서 화들짝 사람을 놀래키더니.

멧돼지가 들쑤셔놓은 봉분도 두기나 되었다.


이제 대부분 연상보다 연하가 많은 집안행사를 마치고 모두 산 아래 친척

집으로 든다. 맞추어 안에서 꿀밤 묵을 수대로 수십 그릇 준비해 놓았다.

매끈한 윤기, 찰지면서도 부드러운 감칠맛. 멸치 다시 국물을 붓고,

양념장을 끼얹고.

김 가루, 김치 다진 고명을 얹어 후루룩 마시는 이 맛이란....

단언코 생애 맛있는 음식 열 가지 중, 세 가지는 여기 고향에서 먹었고

그 모두는 전통 장맛 탓이라 그는 여긴다.

 

산에서 수시로 음복한 탓으로 시장한줄 전혀 몰랐는데 자의 반 타의 반,

기어이 한 그릇을 더 먹고서야 오늘 행사를 마감한다.

준비한 간단한 선물, 농산물들이 나눠지고.

며느리, 사위 새 식구를 맞아 온 가족이 소풍 나오듯 한 단체 직계그룹들을

먼저 배웅하고 그도 출발한다. 땅거미.

차안에 혼자되자 비로소 고향 길, 들판도 눈에 든다. 그러나 그도 잠시.

고속도로 첫 휴게소에 들어 다시 한 숨 붙이기로 한다.


좀 오래 잤나보다. 깨어보니 사방은 이미 짙은 어둠.

다시 커피 한잔을 마신다. 오롯하다. 얼마만인가. 이렇게 밤길.

철저히 혼자인지가.

비로소 여느 여행길보다 더 완벽한 여행자의 심사가 된다.


의무란 타율에서 우리 스스로 구속되지는 말자.

버리기는 쉽다. 그러나 다시 만들기는 힘 드는 것.

이 각박하고, 갈기갈기 분화된 세상에 우리는 친척이란

의무로 일년에 한두 번인 이 행사를 굳이 부담으로만 여길 것인가?

과연 그만한 가치도 없는가?

과연 그렇다면 그 이유, 원인은 무엇인가?

우선 그것부터 없애자. 철저히. 그리고 생각해보자. 처음부터.

가치 있고 없고는 우리가 하기 나름.

자부심이 될지 족쇄가 될지는 우리의 생각 나름.

외려 모두가 꿈꾸는 아주 페스티발한 분위기로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누구나 외로워, 필요로 친구를 사귀는데. 정성으로 이웃도 만드는데.

이미 이 세상에 만들어진 가장 친한 친구, 친척...

그러나 지금은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시대.

다 버리자. 그도. 구속되지 말고. 자유롭게. 그 후로 모든걸 새로이 하자.


다분히 선동적, 감상적, 선각자적 의무감에 사로잡힌 집안어른

한분의 읍소가 다행히 젊은 세대들에 먹혀들었으니

모다 기분 좋게. 기꺼이 참석하는 즐거운 가족 나들이행사로

활기를 띄게 됨은 참 다행스런 일이다.


물기를 빨아들이듯 음악이 온몸으로 스며든다.

오랜만이다. 드보르작. 신세계, 호른소리가 골짝을 돌아

시냇물처럼 정수리로 흘러든다. 은빛 달빛처럼 배경이 되는 현음.

어둠은 새카맣고 정신은 또렷하다. 도로는 한가롭고 속도는 쾌적하다.

곧이어 엄청나게 밀리겠지만.

그러나 그건 지금 아닌 앞의 일.

미리 짐작으로 지례 망칠 필요야 없지.

지금은 이 상황, 이 조건을 충분히 즐기면 된다.

피할 수 있는 것도,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니라면 더더구나.

모과향이 은은하다.

썩으면서도 끝내 향기를 잃지 않는 아주 좋은 미덕을 가진 이 열매.

매년 이때의 수확물로 얼마동안 그의 책상머리를 지킨다.

<작년 사진이다.>

 

       

먼저 평안하신지? 혹 그 위에서 심심하시지는 않으신지? ^^

푸른 강, 흰 모래톱, 살랑이는 노란 미루나무 그늘아래

누워 혹 느슨한 내기 바둑이 이제 지겹지는 않으신지?

여기 향을 살라 혼을 부르고, 술을 부어 백을 모시니

다투지 마시고 싸우지 마시고 친구 이웃 다 부르시고

할배 아배 동기 일찍 가 아직 볼 부은 손아래 일가친척

다 모셔 오셔 이 맑은 술 한잔 함께 흠향하시지요.

(돌아서 저도 한잔 주시고. ^^)

오래 오래 평안하십시오. 이승에서 수고가 많으셨으니.

따뜻한 온기 온 삭신이 다 풀리도록 강변 모래찜질도

한번 시원히 하시고 등 따시고 배불러 심신이, 아니지 혼백이

다 쾌해지시면 이제 이 아래, 아랫것들도 함 살펴 주사이다.

먼저 아직 여기 머무는 그대 반쪽 끝까지 건강히 있다 때 되면

고통 없이 자는 잠에 데려가 주시고 쌍둥이를 배태한 저 새 아기,

새 생명 건강하게 보내주시고. 주시고. 주시고. 주시고...

염체 없지만 마지막으로 이 놈도 마지막 여식하나

곧 입시를 보니 제 한만큼 (실은 프리미엄 쪼금 얹어)

좀 넉넉하게 평가받게 해 주사이다.


 

딱!” 정수리를 한대 호되게 맞았다.

이크, 길 밀리네. 국도로 돌아가자.

이제 겨우 반 왔다. ^^ 

그는 쉬며 자며 그 밤을 도와 놀며 즐기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돌아온 것인 거디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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