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남쪽바다-3 (8~11)

우두망찰 2005. 9. 16. 15:44
 

8.살림망 속에서 마지막 잡은 한 녀석도 그렇게 한다.

잘 가라. 산다는 것도 이런 건지 모르니.


바빠지는 마음을 다스리며, 나는 마지막 일몰을 완상하려는 듯 가만히 앉아 있었다. 가는 시간의 실체가 가장 분명히 보이는 때가 지금이리라. 거침없이 유연하게. 태양은 그 옛날 군주들처럼 한낮동안은 그의 실체를 바라보는 것을 용납지 않다가 마지막으로 밝은 빛 속에 맑게 그 모습을 드러낸 후, 차츰 주변한 빛들을 거두며 점점 붉어져 다홍. 진홍. 선홍. 종래는, 그 온전한 원의 모습과 크기까지 남김없이 보여주며 바다 속으로 잦아들었다. 잠시 앞이 보이질 않는다. 바다는 아직 번득이는 무거운 눈물을 거두지 않고 있다. 침울한 일몰이었다. 선명한 일몰이었다고 생각을 하자.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희망으로 부풀어 떠오르는 아침 해 일터이니. 


 

나는 도구들을 한쪽으로 가지런히 정리해두고 이제 끝까지 물러나 조용해진 바다에 고기를 씻고 다시마 같은 해조류 몇 줄기를 걷어 베이스캠프로 자리를 옮겼다. 올려다본 하늘에 실구름 한줄기가 아직 붉은 노을로 물들어 좀 전까지 빛이란 실체가 있었음을 상기시켜 준다.


간결한 야간용 장비. 성냥갑만한 몸체에 대추알 크기의 할로겐램프가 붙은 헤드 랜턴을 모자챙에 꼽고 벗어 놓은 라이프 재킷, 힙 커버를 다시 착용한다. 한결 따뜻하다. 취사도구의 오밀조밀한 부식 통을 꺼내며 문득 아내 생각이 났다. 그리고 이 시간 집에서의 일상도……. ‘ 잘 있으려무나.’


나는 내일 아침까지 겨냥한 밥을 불에 올리고 고기의 포를 떴다. 양이 너무 많다. 넉넉히 살이 붙은 서덜과 다시마 줄기를 넣어 끓일 준비를 해놓고 한껏 솜씨를 부려 보기로 한다. 남는 건 시간이니. 나는 혼자다. 혼자라는 이 생각이 그만 반추되면 좋으련만. 나는 도전하듯 헤드랜턴을 끄고 사위를 둘러보았다. 


 

전 인간들은 해가지면 잠을 잤었다. 나는 시골에서 자라, 그 원시의 끈질긴 습관의 잔재가 불과 한 세대 전까지만 해도 남아 있었음을 내 아버지로 하여 기억하고 있다. ‘자자꾸나. 어두운데’

아버지는 늘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 옛날 어둠이란 우리 인간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과연 인간은 과학 문명이란 이성으로 이 어둠의 실체를 정복한 것일까? 혹시 잊어버리거나 외면해 버린 것은 아닐까? 전등불도 라디오란 초보적 문명도 없었던 그 시절, 그 밤의 호롱불. 귀가 멍할 것 같던 적막. 인간들은 왜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렸을 땐 잠을 잤을까? 세상 많은 것이 신비롭고 경이로와 신화가 살아 숨쉬던 시절. 이 어둠은 혹시 인간들에게 본능적으로 두려운 존재는 아니었을까? 아니면 역설적으로 문명이란 울타리가 오히려 그것을 고착시키고 심화시켰을까?


나는 포를 뜬 고기의 껍질을 벗겨 종이 타올 위에 올려놓았다가, 보다 얇은 또 다른 칼로 하나하나 셈하듯 정성스럽게 썬다. 결의 반대방향으로. 긋듯이.


처 없이 베어지는 아픔처럼, 사각이는 이 소리___. 나는 버너 소음으로 하여 살점들이 잘리는 이 소리를 느낌으로 듣는다. 물 한 방울 묻히지 않은 그들의 육신은 영혼이 떠나가듯 피가 모두 빠져 생각으로 괴로운, 마음으로 멍드는 그 영원한 굴레에서 해방된 듯 아직 탄력을 잃지 않고 있다. 영혼은 어디에 있는가? 미련처럼, 원망처럼 그들의 기름기가 손에 밴다.


는 프로처럼 썬 모양새대로 가지런히 그들을 도마 위에 정리해 놓았다. 밥이 다 되었다. 나머지 끓일 것을 올려놓고 일어섰다. 주위의 바위들이 낯 선 귀면의 모습을 하고서 갑자기 달려들기라도 할 것처럼 하고 있다. 그대로 가만히 응시한다. 별들. 그렇지 별들이 있었지. 바람은 잔다. 솔바람 소리 같은 처음 끓는 소리가 들린다.

물러설 틈은 없다. 바람이 몹시 분다면 어떠했을까? 구름이나 안개, 비라도 온다면 마음은 어떠했을까. 마음이란 믿을 수 없는 것이다. 믿을 수 없는, 이 속성적인 굴레로부터는 벗어나야 하리.

복장을 추스르고 경직된 몸을 풀며 나는 한 동안 대적하듯 어둠 속의 사물들을 다시 노려보았다. 술을 마시기 전, 깨어 있는 정신으로 평온을 찾아야 하리라. 이럴 때 나를 추스르는 건 이성인가? 의지인가? 아니면 경험인가? 담력인가?


내가 중학교 2학년 때인가 자정을 넘어선 시간, 시오리 시골길을 걸어 혼자 집으로 돌아오던 때를 생각했다. 비 오는 날이면 도깨비불, 그 인불이 요란하게 번득이던 산 구비 길과, 혹부리 영감이 혼자 움막을 짓고 살던 후미진 산모퉁이. 지나는 거지들이 가끔씩 진을 치고 있던 기와 가마터며, 누군가 빠져 죽어 원혼이 맴돈다든 저수지 옆을 지나 자갈길. 그 신작로 길을 고무신을 신고, 사박사박한 서릿발을 밟으며……. 그땐 반쪽 하현달이 중 공중에 걸리어 하얗게 빛나고 있었었지. 누군가 뒤를 낚아챌 것 같던 그 공포를 누르고 결국은 돌아보았던 지나온 길. 그 길에 풀려 있었던 열 푸른 안개. 은빛 달빛. 둥근 달무리. 그 정적.

공포란 결국 마음속에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어렴풋이 생각하고 안도하였던 그 시절. 수 십 년이 지난 지금 나는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가? 무엇이 알고 싶은가? 혹시 아직도 그 무슨 담금질 같은 게 필요해서인가? 아니면 허세같이 치졸한 자기 확인이라도 필요해서인가? 이 나이에. 부질도 없이.


그러나 공포를 지우고 나면, 그 속에 그냥 속속들이 들어차는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상쾌한 것도 같은 이 느낌. 눈물날 것 같은 시려운 이 존재의 실체. 그래, 너희들은 있으려무나. 나는 지금부터 한잔을 할 것이다.


9.나는 아이스박스에서 소주를 꺼내고 잔과 기타 부식류를 간단히 진열했다. 소금과 마늘 몇 쪽을 다져 넣고 불을 낮추었다. 끓인 국물 맛을 본다. 단순한, 그러나 최상인 재료들이 조합되어 만족시키는 이 미각. 자극적인 것 하나 없이 이 맛은 순수하다. 먼저 뜨거운 국물을 한 컵 정도 마신 후, 벗긴 돌돔 껍질을 젓가락으로 집어 살짝 데쳐내어 입에 넣는다.


나는 미식가나 탐식가는 아니다. 그러나 모든 음식의 고유한 맛은 즐길 수 있도록 감각이 유지되게 노력한다. 예전 내가 자랐던 그 환경. 교육되고 길들여져 여과 없이 내 안으로 들어와 나 인양 하였던 그 미덕. 접목되지 못한 공동의 가치. 누습의 산물들. 그리고 무리가 요구하는 보이지 않는 그 교묘한 구속의 허상으로부터 벗어나 차츰, 나름의 시선으로, 자유로 볼 수 있었을 때부터 난 이 감각과 감성들의 무게를 결코 가볍게도 함부로도 생각지 않도록 하였다. 고기의 살점을 씹는다. 이 순간 맛을 느낀다면 그건 지금 내가 정신적이나, 육체적으로 정상임을 말해 주는 증거가 될 것이다.


벌써 추위가 느껴진다. 그러나 난 그들을 천천히 씹으며 술을 한잔씩 들이킨다. 이때는 양념처럼 약간의 의지가 필요하다. 나를 위해 바쳐진 이 고기의 육신. 제 멋 대로인 생각. 한 올의 의지. 이들을 알코올에 섞어 정제하듯 씹으며 난 기다린다. 내 피가 더워지고 마음이 풀리기를.


지만 강렬한 할로겐램프. 지향성. 예각의 불빛. 그 불빛의 폭으로 갇히는 나의 시선. 생각. 의식. 인지. 그리고 또 무엇 무엇들. 광대무변한 이 공간에서…. 결국 불빛의 본질은 구속이다. 불을 끄면 깨어나는 감각. 소리. 느낌. 우주의 넓이. 다가오는 바다___.

나는 어둠 속에서 알코올의 본질적인 맛이 변하지 않을 만큼, 그 속성이 부담되지 않을 만큼만 식사를 하였다.


시계를 굳이 보지 않아도 시간은 얼마 지나지 않았으리라.

나는 느릿느릿, 하나하나 주변을 정리하고 자리를 다시 상단 숙영지로 옮겨 모닥불을 피웠다. 조그맣게. 불씨는 살아나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일가를 이룬다. 따스한 불빛. 트이는 시야. 차오르는 바다.

소리가 들린다. 바다는 반전을 시도하는가 보다. 

 


 

마른 삭정이 가지들은 쉬 불이 붙지만 오래 가질 못한다. 그러나 그들은 아름답고 기세가 좋다. 성급한 젊음처럼. 무책임한 사랑처럼___.

나는 파도에 쓸려 온 눅눅한 목재들을 모닥불 주변에 둘러놓는다. 불땀이 좋은 삭정이가 모두 타기 전 그 열기로 그들이 마르도록.

모닥불을 잘 피우는 방법은 그들이 일정한 세력을 형성할 때까지 쑤석거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넉넉한 성품처럼, 성급한 참견이나 논리적 판단들은 접고, 불 중심에서 떨어져 타다 만 잔가지들이 주변에 너저분해 질 때까지 새로운 탈것들을 계속 공급하며 기다리는 여유가 필요하다.


는 편안히 등을 바위에 기대고 앉아 모닥불이 세력을 형성하는 걸 보고 있었다. 조그만 불씨하나. 그로 하여 비롯되는 결과. 발아하는 씨앗. 잉태되는 생명___. 세상 모든 만물의 생성과 소멸은 모두 다 인과와 필연의 틀 속에 가두어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그 변화과정을 지켜보노라면 참으로 신기해, 보이지 않는 어떤 손길이 분명 작용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여기같이 트인 공간에서는 산소공급이 너무 원활하다. 시간은 넉넉하고, 혼자를 위한 온기는 그렇게 많이는 필요치 않으니___. 나는 주변의 돌들을 주워 다시 모닥불 옆으로 둘러쳤다. 불꽃은 타오르는 정열을 조율하는 법을 그제야 깨달은 듯 자숙의 표정으로 바뀐다. 나는 큼지막한 그루터기를 하나 올려놓았다. 어른거리는 불빛. 이제 불빛은 생각을 할 것이다. 천천히. 나는 술을 마시고.


은 이제 나와 완전히 동화가 된 듯하다. 적당한 육체 활동과 시간 흐름이, 소리 없이 우주가 운행하듯 보이지 않게 소화를 촉진시켜 뱃속은 편안해지고, 식사 때의 반주는 내 안에서 거부 없이 융화하여 이제 그 본연의 의무를 다하는지 술은 아주 자연스레 다시 술을 부른다. 일배 일배 우일배 인가? 좋지.


결국 산다는 건 새로울 것 없이 이미 있는 사실들에 대한 확인 과정, 실증적 검증만으로도 충분하여 ‘아! 그렇지’  ‘그랬었구나.’  ‘이런 거였구나.’ 하는 감탄사만으로도 충분한지 모르겠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생각과 느낌들이 살다 갔는가. 그리하여 이제 생각해야 할 그 모든 것들은 그 답을 찾아 유치해지고, 사유해야 할 시대, 지혜의 시대는 끝이 나고. 빈틈없는 사실들과 끝없이 팽창하는 지식만이 필요한 시대____. 더 이상 애매모호한 수사는 필요치 않다.


리가 무거울 땐 신체적 움직임이 그것을 가시게 하듯이, 오래 서 있거나 먼 길을 걸을 때 피로한 내 육체가 가장 편안해 하는 자세는, 머리와 다리를 좀 높게 두고 몸의 중심 즉 엉덩이 부분을 낮게 두는 자세이다. 백이십도 쯤의 둔각으로 눕혀진 브이자형 자세. ‘하체로 치우쳐 편중된 혈류가 압박에서 놓여나고, 피곤한 근육과 힘줄이 지탱의 임무에서 해방되어 기지개를 켜듯이 넘침이 부족함으로 옮겨지는 자세, 그리하여 찾는 균형점.’ 너무도 당연하고 평범한 이 사실 또한 이렇게 무미건조하게 머리로만 이해해서는 절대 그 묘미를 알 수가 없다. 어느 날 문득 ‘그러고 보니 인생은 덧없이 가더라.’


생의 덧없음이야 어릴 적부터 익히 알고 있다고들 모두들 생각하지만, 젊은이들은 이 말의 진정한 의미를 결코 알지 못한다. 그들이 젊음의 소중함을 결코 모르는 것처럼.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차츰 이 말은 사실로서의 무게가 더해지고, 절절히 베어나 한숨짓게 하듯이. 이 자세의 편안함 또한 직접 체험해 보아야만 내밀한 그 참 맛을 알 수가 있다.

될 수 있으면 몹시 지쳐 땀이 날만큼 힘이 들 때. 계절은 오뉴월, 땅이 따뜻한 기운을 내 뿜을 때. 꺼림칙하다면 고등한 머리는 비스듬한 바위에 기대어도 좋다. 하지만 하등한 - 그러나 굳건한 - 몸통과 하체는 발을 벗어 땅의 부드러움과 훈훈한 기운을 직접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당신은 그 자세로 편안히 누워 생각을 지우고 감각을 조금 깨어있게 한다면 과연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도 절로 느끼게 될지 모른다. 안온한 대지의 기운. 위무하듯 스치는 바람. 부드러운 감촉. 녹아드는 심신.


수십 년이 지나도록 잊혀지지 않고 각인된 이 편안하고 아늑하던 자세에 대한 기억. 사실 이런류의 느낌이야 지극히 사소한 것이지만 평생을 간다. 중요한 그 무엇들은 모두 다 잊을지라도. 고등한 것은 고통스럽게 애써 깨닫고, 하등한 것은 애쓰지 않고도 본능적으로 체득되는 기쁨이 있다.


10. 바다가 차오르듯 술은 차오르리라.

그러나 바다가 균형을 잃지 않는다면 나 또한 균형을 잃지 않을 것이다. 멀리 큰 배가 지나가는지 불빛이 바다에 떠 있다. 이 밤에 배를 타고 떠나는 사람도 있구나. 나는 다시 술을 채운다.


고기의 육신을 한입 가득 씹는다. 술을 마신 기분으로 하여 나는 그들을 경건히 먹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걱정 마라. 경배를 하듯이 먹고 있으니. 사실은 고기가 이제서야 제 맛을 낸다. 시간의 조화인가. 기분의 조화인가? 불빛이 어른거린다. 머리를 뒤쪽 바위에 눕히다.


마음이란 항상 너무 경박하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를 의식적으로는 깨닫지 못한다. 이 짧은 공포와 여유 사이. 마음이 사람의 본질이라면 상황에 따라 변하는 나의 이 본질은 너무 경솔하지 않은가? 쓸데없는 우문이다. 살아 있음으로 변하지 않는 건 없고 마음이야 본래 항상 흐르는 것이니…….


외부적 요인에 의해 마음이 변하지 않도록, 불가피 하지 않도록, 상황 전개를 조절할 수 있는 자는 유능하다. 동의하는가? 애인이 변심하지 않도록, 외면되지 않도록, 기가 죽지 않도록, 어쩔 수 없지 않도록, 내 뜻대로 움직이도록, 용서하는 여유가 있도록, 아주 매력적이도록……. 성공한. 그렇다. 이것은 유능한 자, 승자들의 몫이다.


마음이 올바르도록, 부끄럽지 않도록, 공포에 휩쓸리지 않도록, 욕심에 물들지 않도록, 무지로 흐리지 않도록, 어쩔지 모르지 않도록, 스스로 자긍할 수 있도록, 스스로 기쁠 수 있도록, 넉넉하여 모든 게 깃들 수 있도록……. 각성한. 그렇다. 이것은 현명한 자, 깨우친 자들의 몫이다.


그러나 산다는 건 그것만으로 충분한가? 의식치도 못하는 가운데 변하는 마음. 변하는 나. 통제 불능. 혹시 두렵지 않은가? 알고 있다는 사실은 방어가 되질 못한다.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의식적인 것, 보이는 것, 알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살아 있음으로 마음이란 항상 자기 합리의 묘수를 찾아 흐르는 물과 같은 것. 그러므로 그를 담는 용기인 나의 이 실체는 영원히 그의 그물을 벗어날 수 없는 한 마리의 물고기인가? 그렇다.


러나 마음이야 그런 대로 두라지. 그게 뭐 대순가? 눈을 뜨면 세상을 지배하는 화두는 여전히 바름과 그름, 잘남과 못남, 좋음과 나쁨, 다툼과 화해…….결코 회의함이 없이 너무도 당당한, 이들 일차적 문제의 두터운 그물이 항상 먼저 우리를 반기니. 마음이란 떼려야 뗄 수 없는 자신의 그림자 같은 것. 완전함이란 때로 인간의 냄새가 제거된, 사는 진짜 맛이 빠져 버린 무미함. 피곤함. 인간 스스로가 창조주가 되는 복제 인간에게서나 가능한 끔찍함일지도 모르니___. 그러니 지금은 그만 하자. 재미도 없고.


활처럼 뒤로 눕히다.

바다는 장막을 닫았지만 대신 하늘이 열리다. 시야 전체로 가득 열리다


별은, 이러할 때 별은 너무 싫다.

별은 모름지기 인간들 속에서 보아야 하느니.

술을 마시고 황망한 의식으로 혼자서 계속 별들을 본다면, 기분이 엉망이 된다. 의식은 날아올라 /외로이 창공을 하염없이 날아올라도 /네 까짓 것 여전히 너무나 멀고 /위안이 되질 못해

/어릴 적 건너 동네 문설주에 걸려 있던 /외롭고 가녀린 /초롱불이 생각나고 /진지하게 더욱 진지하게 들여다보노라면 /더더욱 외롭고 깊이가 두렵고 /어릴 적 각인된 그 엄청난 단어들 /광년. /수백 또는 수백만.

/그들의 외롬이 가슴을 베이고 /그 말의 무게가 나를 짓눌러 이윽고 /다시 보면 결국은 눈물이 날 것 같아 /이제 그만 /술이 깨잖아

/ 별. 별들은 혼자서 보는 게 아니다 /혼자서 보는 별은 /언뜻 언뜻 스치듯 보아야지 /진지하게 보아선 가슴이 베이나니 /이 시간 차라리 어두운 바다를 보자 / 어두운 밤바다 /손닿을 내 옆에 그들이 있고 /그들은 너무도 육감적이니 /차라리 어두운 바다를 보자.


적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나는 소리라도 지를까 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내 것이 아닌 양 너무나 생경할 것이기 때문에 그만 두기로 한다. 술이라도 더 마시자. 아직은 제 정신인 것 같으니. 나는 안주를 열심히 먹었다. 그들의 육신은 아직 무른 구석 하나 없이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다. 그러나 나는 풀어졌음인가 생각을 너무 많이 한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할 거라곤 이것, 생각 밖인데.


제인가 이 보다 육지에서 가깝게 나왔을 때 건너편 섬에 진주한 팀들이 밤낚시를 하는지, 가끔씩 비치던 랜턴 불빛을 보고 실소를 머금은 적이 있다. 캄캄한 밤중 바다 한가운데. 시커먼 바위틈에서. 무얼 하겠다는 건지. 간간이 비치던 그 가녀린 불빛. 세상에 미친놈도 많아. 서글프던 기억. 그런데 왜 돌아서면 몸서리쳐지는 이 공간이 그리 그리운 걸까?


한때 나도 그것이 이상해 내게 있어 낚시란 그 무엇도 아닌 그럴싸하게 포장된 한낮 집착이며 욕심일거라고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욕심을 지우고, 나름대로 지울 만큼 지우고 다시 보니 역시 욕구도 한 가닥 걸려 있더라. 나머지는 모르겠고.

알 수 없는 마음의 흐름. 개인적 취향이겠지. 사람이 다 같은 건 아니니. 난 참 낙천적이다. 애쓴 보람이다. 결국 사람이란 모두 자기 자신의 잣대로 세상을 잴 수밖에 없다.


만히 있으면 귀속이 멍해지고 정신도 멍해진다. 동물적 상태다. 짐승들이 무얼 생각하는지도 모르면서 동물적이라고 쉽게 말해 버리는 건 관념적 속단이다. 생각 이전 말의 습관적 타성인지도 모르지. 오염되다. 하지만, 이 침묵의 끝은 무엇인가? 무인가?___ 허인가?___ 공이던가?___ 그렇다.


할 일이 없다. 거래선가? 수형인 에게 가장 가혹한 형벌은 독방. 지하 감방, 암흑인 혼자의 방이라 한지도. 그런데 인간 된 책임은 그런 상황까지도 유추해 보아야 하는가?...... 죽음이 있으니 필요할지도 모르겠군. 그래, 나는 죽음에 대해 어떻게 입장 정리를 하고 있는가? 생각 없이 당하기는 싫을 테니, 무언가 생각은 있겠지. 그러나 나는 죽음에 대해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고 있다. 본능적 공포는 극복했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것들로 하여 마음이 고통스럽지 않는 건 아마 아직은 너무 젊었거나, 살아온 전력으로 이미 타협을 했거나, 포기했거나, 아니면 나름의 해답을 찾았거나 일 것이다. 그러나 그게 어쨌다는 거냐. 알아서 더 나은 게 무언가? 지독한, 아니지 지독하지만은 않지. 허무와 자괴감 이후의 조로감…….


다는 것과 구원 사이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 너무 일찍 서둘러 알지 않도록 하라. 안다는 것 그것, 사는데 별로 도움이 되질 않는다. 방해만 될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결국 생명 가진 모든 것은 소중하고, 새록새록 어여쁘다는 새삼스러운 사실. 그 따뜻한 느낌마저 결코 허무를 넘지 못한다. 넘더라도 세상이 변하는 건 없다. 자신의 무게야 항상 고스란히 자신의 것임을 깨달아 무얼 하겠다는 건가. 역시 인간인 것이다. 죽음의 고통과 공포의 대가를 치르고서 체득하였을지도 모를 그 대가가 겨우 체념이라면, 순응의 침잠이라면, 허허한 웃음이라면……. 그걸 기를 쓰고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가? 깨달음이란 차오르는 기쁨이 아니라 맥이 빠지는 순화이다.


술이 취한 건가. 이 기분. 외로운. 언제나 느끼는 이 혼자서의 불안정함. 연습이 언제나 도움이 되는 건 아니지만 연습 또한 부족할 것이다.


달이라도 떠오른다면 좋으련만. 나는 일어섰다. 조용히 어른거리는 불빛을 더듬어 나는 바다 쪽 단애에 서서 오줌을 누었다. 남극 탐사를 위한 전초 기지에서는 대소변을 얼려(?) 외부로 반출한다는데, 여기 이 공간은 축복받은 곳이라 얼지 않는 대기가 분해하고 소멸시켜 그들을 품으로 흡수 할 것이다. 소멸되지 않고 영원히 남는다는 것, 그것도 문제구나. 나는 시원하다. 긴장과 이완. 육체가 그러하듯 정신도 가끔씩은 그 오물을 버려야 하느니. 지금은 이완의 때.

그러나 바다는 빛도 잃고 생명도 잃고 어둠 속에서, 진부한 관념에 사로잡혀 거대한 몸집을 뒤척이며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11.나는 어릴 때 무언가 굉장한 비밀을 어른들이 숨겨놓고 있을 거라는 공상을 하곤 했었다. 그리하여 어느 날 아침 내가 눈을 떴을 때

  ‘얘야 놀랐지. 장난이야. 두려워 말거라. 인생이란 바로 이런 거란다.’

하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나타나, 나를 괴롭혔던 그 모든 까닭모를 불안이나 막막한 느낌을 하나하나 차근차근 설명해줄 것 같은 그런 공상 말이다.


그러나 인생이란 숨바꼭질 놀이처럼 ‘못 찾겠다.’ 고만 하면 모든 게 풀려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오는 그런 게 아니더라. 보일 듯 말 듯, 반 투명지에 싸인 그 한 꺼풀의 수수께끼는 늘 나를 안타깝게 하고, 반의식의 선잠에서 가위에 눌린 듯 아무리 손을 내저어도 벗어날 수가 없는 그런 것이더라.


하지만 그 시절, 시간이란 초단위로 째각째각 하나하나 살펴가며 온갖 의미로 가더라. 세상 모든 건 막연하고,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언뜻언뜻 스치기도 했지만. 시간은 더디고 보이는 모든 것은 아침 햇살에서처럼 또렷하여, 어제와 그제, 오늘과 내일이 분명하듯 나는 내 안에서 내 것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얘야 이도 저도 아니면 안 된다. 인생이란 셈할 것이 많은 거란다’ 고 하시던 말씀.

그리하여 그 후의 시간들은, ‘이도 저도 아니면 안 된다’ 는 그 이후의 시간들은, 차창으로 바라보는 바깥 풍경처럼 휘닥휘닥 그렇게 황망히 지나가 버리더라.


별, 별들이 부서지는 소리. 빛나는 것들. 날카로운 것들. 가슴 저미는 것들. 그리하여 빛나는, 모 나는 모든 것들은 모질게도 다듬어져 하나의 벽돌이 되고, 벽돌 속에 벽돌이 되어 지도 속에서 사라진 길처럼 그렇게 사라져 버렸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난 지금, 난 이미 그 벽돌 됨을 안타까워하지 않고 후회하지 않을 줄을 안다. 비록 그것이, 그 모든 반짝이는 걸 포기해야 할 만큼 무슨 대단한 가치가 있는 것도, 커다란 의미가 있는 것도, 또 무슨 빛나는 보석 같은 것도 결코 숨겨놓고 있지 않다는 걸 알았지만____.


하지만 세상을 산다는 것도 그렇게 만만한 것만은 아니더라. 자신을 추스리는 문제도 평생을 부둥켜안고 갈 문제이지만, 예속된 육체에, 이용할 물질에 치러야 할 셈도 많더라.

또한 태초부터 내가있고 네가 있음으로, 그로부터 비롯되는 끈임 없이 조화해야할 일. 그리고 이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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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略 3pag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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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은 끝이 없지만, 여전히 인간은 백지로 태어나고, 세상은 넓고, 나는 혼자고, 술 맛은 달다.


그러니 인생은 방학을 가지면 안 될까?

모두가 원하고, 아무도 뭐라지 않으니 얼마나 쉬운 일이냐. 인간들끼리 약속만 하면 된다. 인생에 방학을 주기로.

지도자란 자들은 뭘 하는지 몰라. 출생 신고서에 방학 스케줄 쓰는 걸 잊다니.

그리하여 ‘n’분의 1로 축소된 자신을 펴고, 스스로의 추진력으로 제동장치도 없이 미친 듯 달리는 이 기차에서 내려, 차근차근 둘러보고 정리도 해볼 수 있을 텐데.

‘n분의 나머지가 주는 방학이니 숙제는 있어야겠지.’

‘... 그래, 그것은 어쩌면 ‘혼자서’ 라는 과제가 좋을지 몰라.’

사무치게 그리울 것이니. 세상 모든 게 소중할 것이고, 새롭게 새롭게 사랑할 수 있을 지이니.

‘인간으로 돌아가는지..., 향해 가는지. 기차 한 칸 마련해 놓을 테요?’


술이 취한다. 예전에 버린 의미의 바다.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건 허무라도 한 자락 붙들고 있어야 하는 것이거늘.

나무를 몇 개 올려놓았다. 길게 누웠다.


다시 파도소리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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