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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사진4

우두망찰 2012. 12. 9. 22:18

 

 

 

 

 

 

 

 

 

 

 

 

 

 

 

                                                

 

 

 

 

 

 

 

 

 

 

 

 

 

 

 

 

 

 

 

 

 

이름 짓기가 왜 이리 힘든가

 

콘크리트의 발명은 인류 문명사에 한 획을 그은 아주 큰 전환점이었을 것이다.

마치 토기에서 청동기, 청동기에서 철기로의 이행처럼. 자연재료인 석재에서 느끼던 불편과

한계를 같은 강도와 내구성을 가지면서도 훨씬 손쉽고 경량으로 원하는 모습으로 떡 주무르듯

할 대체품이 생겼으니 그 희열이 얼마나 컷을까.

짐작컨대 발견당시 이 재료는 그 가요성으로 지나간 문명의 복제 복사에도 한참을 골몰한 적이

있는 것 같다. 이를테면 19세기나 20세기 전반의 종교시설, 공공건물 등에서 그 흔적이 쉽게

보이므로. 미 동부의 주요도시들을 여행하다보면 이런 이행의 과정이 잘 눈에 띈다. 즉 그때의

기간 교통망인 철도역사 같은 대중적 건물에서 중세 유럽 것처럼 석재로 짓고 장식을 할수는

없었을 테고(비용과 시간문제로), 그들의 문화 원류의 뿌리로 모양은 내고 싶었고, 마침 노동

력은 지금처럼 비싸지는 않아 한땀 한땀 정성스레 거푸집 장식을 짜고 양질의 골재를 잘 배합해

성형에 놓은 그것.

그것들은 지금 봐도 눈부시다. 집 전체, 건축 양식, 건축가의 디자인이 아니라 그 물성을 이룬

작업의 정밀함이. 정성도가. 기능성이(요새 이런 쟁이, 장인으로서 기능인은 없다). 콘크리트

그 거친 것을 담아낸 목공의 쪽 널판의 마름질 솜씨. 가지런한 마음씨. 목재의 결이 그대로 살

아 숨 쉬는 표면 텍스추어 무늬와 질감. 그럼으로도 한 직업인으로, 가장으로, 생활인으로도

떳떳이 자립이 가능했던 그 시대의 품성도 그렇고.

 

(참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콘크리트 물성의 아름다움이 고스란한 유적? 하나를 우리나라에서도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동백으로 유명한 거제 지심도에서 이다. 어느 해 겨울 끝에 찾은

그곳 동백 숲에서 전혀 엉뚱한 인공구조물 하나를 발견하고는 나는 잠시 주춤했었다. 일제가 남긴

잔해. 태평양전쟁의 말미 강제동원의 노동착취로 지었음이 분명한 원형으로 완전한 콘크리트 포좌

하나. 반백년이 지나고서도, 끈임없는 바닷물 소금의 부식공격에서도, 햇빛과 풍우에 그대로 노출

방치된 환경에서도 ‘싱싱했다.’ 그에 대한 나의 첫 소감이었다.

이후 근래 우리가 지은 수천 수만의 아파트 구조물들이 30년을 버티지 못하고 스러져갈 때, 그 배

이상의 시간을 견디고도 저렇게 단단하고 고스란하다니. 신음처럼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겠다는 아

픔. 강제노역의 비분과 고통을 일로 승화 비지땀을 흘렸을 그때 선조들의 이마에 부는 한줄기 바람

의 위안처럼, 그 싱싱함은 어떤 감동 시원함을 느낄 수 있었는데. 그 순수 우리 것인 모래알, 자갈

들의 단단한 결집. 표정. 색깔들)

 

그러다가 이 콘크리트는 잠시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진다. 곧 대량생산의 시대가 도래하여 그의 과묵

함, 본성처럼 장식적 요소는 빠지고 보이지 않는 중추, 뼈대로 물러나고. 치장과 표면은 좀 더 간단

하고 쉬운 페인트, 벽지, 회반죽 플라스터 등에 내어주고.

롱샹의 부드러운 양괴감은 희미해지고, 굳건 보단 경직. 과묵보단 몰개성으로 치부되어 잊혀져 간다

는 것. 이런 석재 대체품, 싸구려 공산품에서 일약 당당한 문화의 주역으로 콘크리트가 다시 등장하

게 된 것은 지나친 장식(분칠)의 염증, 건축폐기물 양산 같은 지구 환경적 자각의 배경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한 동양 건축가의 영향이 큰 것 같다.안도 타다오. 콘크리트의 물성을 동양적 시각, 가치관

으로 직시 다시 풀어낸 사람. 이것은 서구문명의 물질,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물체 자체를 하나의 생명

존재 자체 그대로 보았을 때 보이는 단박한 숨결을 알아보고(주장하고) 주 표정으로 썼으니.

그 주재료가 그렇듯 그것은 다시 자연을 닮았다.

 

(요즘 회자되는 콘크리트의 부작용 대부분은 인공적 첨가물 소위 혼화제로 거의 기인된다.)

그래서 요즘 세상 어딜 가도, 우리 주변 어디를 봐도 멋쟁이 건물들에는 소위 노출 콘크리트란 공법,

스킨을 못 써 안달인 것처럼 판을 친다. 무언가 덜어내기 위해, 쓸데없는 군더더기 장식은 불필요하다

치운 그 정신의 자리에 기능, 정성이 못 따르니 예전 장식 이상의 시간과 비용으로, 또 하나의 겉멋,

보여주기 위한 치장 수단으로 전락해서.

어쨌든 문화는 언제나 진행형이고 가짜는 곧 식상해진다.

 

그런 관점에서 이 사진의 벽면. 콘크리트란 기댈 곳이 있어 자연 판석을 하나하나 쌓아올린 이 도시의

지층이고 싶은 연출 지층. 정성에 감복할까? 지나치다 비판할까? 자연적인가? 자연 파괴적인가?

이름은 어떻게 붙여야 하나?

몇 번의 이름을 바꾸어 부치다 결국 포기하고~

 

 

 

 

(나는 건축전공이 아니다. 문과출신도 아니고. 관련되는 전문서적을 읽어본 요약도 아닌 순전히 이때까지

보고 들어 현재 나를 이루는 총제척 짐작만으로, 느낌으로만 쓰니 분명 오류가 많을 것이다.

그러니 누구라도 곧이곧대로 믿어 손해 보지는 말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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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m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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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p ;폰으로 찍는 사진의 만족도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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