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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령

우두망찰 2010. 10. 29. 18:20

 

 

 

 

 

 

 

 

죽령 


소백산 자락에 살기에는

나는 아직 준비가 필요하다

내 아이를 양육하는 아버지의 일과

내가 약속한 아내의 일

그리고 둥지를 틀 공간도 마련하여야 할 테니


풍기에서 바라보는

연화봉 두솔봉 아래 연봉들은 충분히 높은데도

고래 등 같이 원만하고 부드러운데

그 아래 산맥이 장대히 팔 벌려 내달리고 나면

그 품은 넉넉하여 세상전부를 담아내도 모자라지 않을 여유가 있나니


나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너는 지금 여린 찻잎 순 같은 생명들을 키우며

사슴녹각 솜털같은 은록빛으로 뿜어나고 있구나


소백산 자락에 살기에는

나는 아직 준비가 필요하다

아직은 안주치 못하는 내 젊은 혈기를 소진하는 일과

내 영혼이 유영할 자유를 살, 일을 하는 일

소백산 자락에서는 쩨쩨하게 살고 싶지 않아

거침없는 영혼으로 살고 싶어


세상이 만만하고 분별 또한 있다면

저 산은 아이들께 큰 바위 얼굴이 되어 줄 터이지만

세상은 만만치 않고 나 또한 부족해

아직은 때가 아냐


먼 훗날

영혼이 가난할 때는 찾아와 주세요

하룻밤 안식할 집 한 칸 마련해 놓을 테니

그래도 시렵거던 내 거처의 문을 두드리세요.  벗되어 드릴 테니

아니 물이 되어 드려야 겠구만

아니 바위가 되는 게 좋겠어.


어쭙잖은 관심은 나도 질색

그러나 당신이 필요로 한다면

말없이 차 한 잔 되어드리는 건 나도 찬성

사람이 사는 건 적당한 소란스러움이 있어야 하거늘

살아 있음으로 나 또한 많이 적적해 할 거외다


이거 좋은 생각이야

소백산 자락에 살기에는

여기 밤이면 별빛이 맑아 하늘은 장대히 열리고

온갖 신비의 교신들로 가득할 테니

내 미혹의 둔감한 안테나만으로도

정상 천문대를 중계소 삼아

영혼의 불꽃을 우주로 쏘아 보낼 수 있으리이니

(Emotional technology)


소백산 자락에 살기에는

나는 아직 준비가 필요하다

그리하여 오늘 스쳐 지나며 눈으로 인사할 뿐

내 마음 가득 담아 다만 눈으로 인사할 뿐

                                               


(1998.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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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을 보니 이렇게 쓴지 십수년

삼십대였던가? 사십대였던가?

아이들은 다 자랐고 아내는 늙어갔는데

나는 아직도 준비 중인가? 준비를 마쳤는가?

세월은 가는데

갈바람 같은 소슬함 하나로

꺼내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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