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령
소백산 자락에 살기에는
나는 아직 준비가 필요하다
내 아이를 양육하는 아버지의 일과
내가 약속한 아내의 일
그리고 둥지를 틀 공간도 마련하여야 할 테니
풍기에서 바라보는
연화봉 두솔봉 아래 연봉들은 충분히 높은데도
고래 등 같이 원만하고 부드러운데
그 아래 산맥이 장대히 팔 벌려 내달리고 나면
그 품은 넉넉하여 세상전부를 담아내도 모자라지 않을 여유가 있나니
나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너는 지금 여린 찻잎 순 같은 생명들을 키우며
사슴녹각 솜털같은 은록빛으로 뿜어나고 있구나
소백산 자락에 살기에는
나는 아직 준비가 필요하다
아직은 안주치 못하는 내 젊은 혈기를 소진하는 일과
내 영혼이 유영할 자유를 살, 일을 하는 일
소백산 자락에서는 쩨쩨하게 살고 싶지 않아
거침없는 영혼으로 살고 싶어
세상이 만만하고 분별 또한 있다면
저 산은 아이들께 큰 바위 얼굴이 되어 줄 터이지만
세상은 만만치 않고 나 또한 부족해
아직은 때가 아냐
먼 훗날
영혼이 가난할 때는 찾아와 주세요
하룻밤 안식할 집 한 칸 마련해 놓을 테니
그래도 시렵거던 내 거처의 문을 두드리세요. 벗되어 드릴 테니
아니 물이 되어 드려야 겠구만
아니 바위가 되는 게 좋겠어.
어쭙잖은 관심은 나도 질색
그러나 당신이 필요로 한다면
말없이 차 한 잔 되어드리는 건 나도 찬성
사람이 사는 건 적당한 소란스러움이 있어야 하거늘
살아 있음으로 나 또한 많이 적적해 할 거외다
이거 좋은 생각이야
소백산 자락에 살기에는
여기 밤이면 별빛이 맑아 하늘은 장대히 열리고
온갖 신비의 교신들로 가득할 테니
내 미혹의 둔감한 안테나만으로도
정상 천문대를 중계소 삼아
영혼의 불꽃을 우주로 쏘아 보낼 수 있으리이니
(Emotional technology)
소백산 자락에 살기에는
나는 아직 준비가 필요하다
그리하여 오늘 스쳐 지나며 눈으로 인사할 뿐
내 마음 가득 담아 다만 눈으로 인사할 뿐
(1998.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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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을 보니 이렇게 쓴지 십수년
삼십대였던가? 사십대였던가?
아이들은 다 자랐고 아내는 늙어갔는데
나는 아직도 준비 중인가? 준비를 마쳤는가?
세월은 가는데
갈바람 같은 소슬함 하나로
꺼내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