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남쪽바다4

우두망찰 2008. 6. 13. 13:41

 

 

 

 

~

상용 식수 두통, 내일 쓸 냉동크릴을 보관한 소프트 아이스 백 하나, 상

하기 쉬운 부식류를 담은 하드케이스의 아이스박스 등은 바위그늘에 들여놓

고, 텐트와 침낭 기타 소품 류는 아까 보아둔 제법 넓고 평평한 위쪽 바위

까지 옮겨다 놓았다. 조구 류는 일목요연하게 정리, 어떠한 상황에서도 흩

트려지지 않고 손쉽게 찾을 수 있도록 하고는, 잠잘 곳과 이곳 베이스캠프,

그리고 아래쪽 낚시터를 연결하는 통행로 하나하나를 상황별로 분류 머리

속에 입력한다. 그리고 소품주머니에서 선 바이져 크림을 꺼내어 얼굴과 손

등 등 노출된 피부에 펴 바른다. 오늘 같은 일광이면 피부는 생각보다 많이

탄다. 심하면 불쾌 할 수도 있고, 돌아갈 때 너무 티가 날수도 있으니, 이

 정도면 적당하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왜냐하면 약하게 피부가 그을렸을

 땐 그 자체로 열이 조금 나, 밤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며, 그로 인해 신경

이 분산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계절 바닷가의 밤은 매우 춥고 외롭다.


~


 그러나 난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본능이 이미 한 가닥 희미한 가능성 같은

걸 발견한 것을 감지한다. 고기는 아직 있으며, 바늘은 튼튼히 그의 입안에

박혀 있다는 것, 그리고 바닷물 속 상황이 아직 해결치 못할 정도로는 꼬여

있지 않다는 느낌인 것이다. 여유 있게 풀려 있었던 낚싯줄 탓이리라. 약간

의 부담스러움을 느낀다. 언젠가는 움직일 것이다. 나는 좀 더 여유를 갖기

로 한다.

나는 이 고기에게 몇 번 실패한 경험이 있다. 그건 내가 한순간 먼 곳을 바

라보았기 때문 일수도 있고 멍하니, 그렇지 그냥 의식을 풀어놓고 멍하니

바라다만 보고 있었기 때문 일수도 있고, 이 고기의 입질이 너무 급작스럽

기 때문 일수도, 그들의 힘이 너무 파괴적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여하

튼 이 녀석들은 순간에 제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통상, 보다 우직

한 대와 튼튼한 줄을 사용하여 무는 순간 그야말로 개 끌듯이 사정없이 끌

어 내는 방법을 쓴다.

다시 낚싯대에 좀 더 강한 힘을 실어 본다. 역시 요지부동. 포기할까를 생

각하다 고기가 문 낚시 바늘 생각이 났다. 지금 무리를 해 줄이 끊어진다

면……. 그건 정말 무의미한 살생밖에 되지 않으리라. 죽을 때까지 고통이

따르는. 

시간이 제법 흐른다. 목 줄기와 등에 땀이 솟은 게 느껴진다.


  ‘다음 파도를 노려야 해’


~


 고기는 예상대로 돌돔이다. 눈빛은 오직 한색, 투명한 검은빛으로 깊숙이

내려앉아 있고, 지느러미 갈퀴는 작지만 창처럼 날카롭고 단단하다. 몸통은

유선형을 벗어나 보다 둥글어 보이며, 피부는 가죽처럼 튼튼하다. 어릴 때

는 흰색과 검은색의 줄무늬가 선명하여 열대어처럼 보이다가 성어가 될수록

무늬의 채색이 불분명해진다.

  ‘이 계절, 이 고기가 아직도 이 바다에 있는가?’ 고 잠시 의문을 가지다,

여긴 남해이며 내가 멀리 나왔음을 기억한다.

겨우 놈을 들어내었다. 새삼 고기 크기가 현실로 느껴진다. 길이는 오전 감

성돔보다 짧았지만 체고가 높아 훨씬 커 보인다.

왜 이지? 이건 순전히 행운이다. 그러나 마음은 오전의 그 차오르던 흥분이

나 만족 같은 빛이 없이 조용히 가라앉아 있다. 시간을 너무 끌어, 우연이

어서, 냉정한 계산에 의한 승부여서? 그럴지도 모르지. 맥이 풀린다. 허탈했

다. 기를 쓰고 한다? 그건 내 적성에 맞지 않다. 바다가 물러나고 있다.




후에는 맥낚시를 하기로 했다.

이건 비과학적 비문명적 낚시기법이다. 그러나 보다 철학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다. 그 전에, 나는 아쉬운 듯 웃통을 모두 벗어 땀을 말린다. 논 슬립

핀이 박힌 갯바위 장화를 벗고 양말도 벗어 밀폐되어 눅눅해진 발을 드러내

어 말린다. 시원하다. 일시에 땀이 가신다. 내가 걸치고 있던 옷의 무게가

옷을 벗음으로 새삼 실감이 되는 듯 가벼움을 느낀다.

옷들을 햇볕이, 바람이 잘 들게 널고 그 위로 몸을 눕히다. 하늘이 무시무

시하도록 맑다. 빗겨가는 햇살이 보이는 것도 같다. 바위의 온기가 따사롭

다. 어젯밤을 세워 달려온 먼 길과 부산스럽던 새벽 부두, 힘들었던 섬 접

안, 그러한 모든 것들이 아련한 피로로 한꺼번에 몰려오는 듯하다. 수건으

로 얼굴을 가린다. 따스한 햇볕과 간지럽히는 바람에, ‘잠들면 안 되는데.’

하는 의지는 증발하듯 사라지고 나도 모르게 잠 속으로 빠졌었나 보다. 약

간은 소란스럽고 선뜩한 느낌에 눈을 뜨다.

 

 

 


은 깊이 내려앉아 바위에 붙어 있고, 눈에 들어온 하늘은 여전히 선글라

스를 낀 것처럼 짙푸르다. 정신이 하나하나 되살아나 다시 제 자리를 잡는

다. 짧지만 맑고 깊은 잠이었다.

나는 한참을 그러고 누워있다 털고 일어나 서둘러 옷을 주워 입었다. 옷의

감촉이 포근하다. 바다는 이제 본격적인 이별을 준비하려는 듯 약간 부산스

럽다. 나도 여유가 있을 때 준비를 마치기로 한다.

 

 

 

먼저 섬 위로 올라가 보기로 했다. 손에 잡힐 듯 가까운 거리지만 숲으로

오르기에는 제법 가파른 단애가 가로막고 있다. 겨우 길을 찾아 산위로 오

른다. 모진 해풍으로 한쪽으로만 낮게 자란 가시나무, 동백, 후박, 그리고

또 다른 이름 모를 상록수림들. 벌써 하얗게 피고 말라 서걱거리는 억새들

을 헤치고 정상부근 곰솔 아래에 이르다. 소나무 가지사이로 내려다보이는

솔잎이 드리워진 바다. 말 그대로 조용한, 그림 같은 풍경이다. 이웃한 주변

섬 옆으로 조업선 몇 척이 조는 듯 떠 있다. 섬은 늘여진 에스자형의 길쭉

한 모양이다. 앞이 탁 트인 내가 자리한 이곳은 태양의 운행으로 보아 이

섬의 남쪽 곳 부리인 모양이다. 약간 비껴 뒤쪽은 이곳보다 좀 더 높고, 후

방으로는 점점이 섬들이다. 온통 적막한 이 공간에서 그 섬들과 조업선들로

하여 나는 약간 위안을 받는 기분이 된다.


내려다보는 가까운 바다는 참으로 많은 색깔들을 담고 있다. 전체적인 색조

는 짙푸른 청색이지만, 청록. 담록. 암록. 초록. 연록 등, 이름 할 수 없는

온갖 오묘한 녹색조가 군데군데 선명한 띠를 형성하고는 조류와 물결, 순간

순간의 빛과 음영에 따라 빛깔이 변해간다. 바다가 숨겨 논 참으로 경이로

운 모습이다.  모래나 해구, 해조류 따위의 영향이리라.

조용히, 얌전히 누워 헤적거리는 바다는 아직 잔치가 끝나지 않은 듯 빛을

가득 품어 풍요롭고, 먼 수평선은 지구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려는 듯 아

득하게 완만히 둥글어 보인다. 바람이 분다.

 

 


는 떠오르는 상념들을 누르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중간 중간 마른 삭정이 가지와 땔감들을 주워 텐트 칠 야영지를 겨냥해 던

지고는 가볍게 내려왔다. 텐트를 펼치다. 이인용 동계 텐트다. 연결 끈을 묶

고 바위틈에다 준비해간 대못을 고정시킨 후, 나머지 틈도 나뭇가지들을 박

아 메우듯 마무리를 하고서야 소품 류를 텐트 속에 정리하다.

쓰라린 몇 번의 경험이 나를 용의주도케 하였다. 바다를 쉽게 보아선 안 된

다. 이 섬의 오부능선까지 나무들이 없는 건 거기까지 바다가 자주 끓어 넘

쳤다는 증거이다. 어느 핸가는 도착 시 며칠 전 파도로 그 언덕위의 풀들까

지 잔뜩 소금을 뒤집어쓰고 시들어가는 것을 보았던 기억도 난다.


남해 원도. 나는 혼자다. 혼자와 둘의 그 하늘과 땅 차이를 나는 잘 알고

있다. 그 차이로 생각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 육체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관찰자로서 나를 들여다보던 경험이 있다. 그건 전혀 낯설고 상상으로는 알

수 없는 새로운 세계이다. 강아지 한 마리가 있고 없고 에 따른 그 엄청난

차이. 믿을 수 없는 마음의 신기한 변화. 인간을 떠나, 익숙한 것들을 떠나

정신은 얼마나 쓸모없는 것인지, 나약한 것인지, 또 얼마나 깊이 육체에 예

속되어 있는지를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모를 것이다. 인간들끼리 약속하고

타협한 그 멋대로 인 울타리들……. 무리를 떠나, 문명을 떠나 혼자일 때,

스스로를 받쳐 주던 그 모든 요소들이 얼마나 허세와 허구에 차 있으며, 하

잘 것 없고 쓸모없는 것인지. 그리고 자신은 또 얼마나 공포에 취약하고,

믿을 수 없는 존재인지도 분명히 보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문명이란, 정신

이란 한낱 사치. 믿을게 못된다. ‘완벽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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