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

나무7-자작

우두망찰 2007. 5. 14. 11:12

 

 

 

 

 

 

 

 

 

 

 

 

 

 

 

 

 

 

 

 

 

 

 

 

 

 

 

 

 

 

 

 

 

 

 

 

 

 

 

 

 

 

 

 

 

 

 

 

 

 

 

 

 

 

 

 

 

 

 

 

 

 

 

 

 

 

 

 

 

 

 

 

 

 

 

 

 

 

 

 

 

 

 

 

 

 

 

 

 

 

 

 

 

 

 

<이 이야기는 제 이야기가 아닙니다.

한때 한 클럽에 몸담았던 어느 선배님 이야기로 논픽션.

그해 말, 제가 ‘올 해의 다큐멘터리 상’하며 멋대로 발표하고, 소설화를

허락해 달라 생떼를 쓰던 중 연락이 끊김. -사연인즉 연락 두절은 심장

마비에 의한 갑작스런 죽음으로 1년 후에나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음.

그래서 그 꿈은 유산. 물론 실력도 못 따랐을 테고~.

지난 주말 이곳 덕유산 계곡을 다녀오다 마침 이 사연이 생각나

자작나무 사진에다 이 글을 첨부해 올림. 누가 되지 않겠지~ 하고.

따라서 -이 글은 제 게 아니므로 불 펌, 복사, 유포 금지 ^^.  >

 

 

 

 

 

내가 일본에 있는 우리 대사관에 근무(문화 attache’)하던 20여 년 전 이야기다.

어느 날 10여명이 모이는 조촐한 파티에 참석하고 있었는데 내 자리가 문 쪽을

향하고 있었다. 옆 사람하고 이야기하다가 언뜻 문 쪽을 보니 어떤 30대 초반의

여성이 들어오더니 나와 눈이 마주치자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나를 뚫어

지게 바라보다가 급히 밖으로 나가버렸다.

나는 잘못 들어온 사람인가 보다 하고 있었는데 한참 있다가 그 여성이 다시

들어오는데 손수건으로 연신 눈물을 닦고 있었다. 영문을 묻는 사람들에게 내가

돌아가신 자기 아버지와 너무 닮아 순간적으로 아버지가 살아 돌아오신 줄 착각

했다는 것이다.

파티가 끝난 후 인사 소개가 있자 그녀는 나를 앞으로 아버지로 모시겠다 했다.

나는 순순히 그러라고 했다. 호박이 넝쿨 채 떨어진다더니 나는 졸지에 다 큰 딸

을 하나 얻게 된 것이다. 40대의 아버지에 30대의 딸이었다.

그런데 내가 어릴 때부터 데려와서 키운 딸이면 수양딸 또는 양딸이 되겠지만

키운 적이 없으니 그렇게 부를 수는 없다. 우리들의 학생시절에는 맺은 동생 맺은

언니를 흔히 S동생 S언니라 했는데 그렇게 보면 나에게 S딸이 생긴 것이다. S의

어원은 알 수없다.


이 아이로 말할 것 같으면 오사카 출신 재일교포 2세였다. 1970년 오사카 만국

박람회 때 여고생 도우미로 일하다가 세상 넓은 줄 알게 되었다. 일본에서 대학

까지 나와 봤자 차별도 있고 하여 변변한 일자리도 없을 터 가방 하나 달랑 들고

무작정 뉴욕으로 갔다. 연고도 없고 하여 그 넓은 천지에서 죽을 고생을 하다가

어렵사리 핑거 모델 자리를 얻어 밥은 먹게 되었다.


어느 날 지가 사는 동네 길거리에서 늙은 부부가 안고 가는 강아지가 너무 예뻐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그 다음 날부터는 아예 그 집 앞을 서성이며 그 노인네가

강아지를 안고 나오는 것을 지키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용감하게도 그 부부에

게 강아지를 양도해 달라고 간청했다. 처음에는 그 노인네들이 완강히 거절했다.

그러나 그 아이가 워낙 집요하게 그 집 주변을 맴돌자 어느 날 안노인이 그 아이

에게 자기들이 살면 얼마나 살겠나 니가 더 오래 살 테니 이 강아지를 니가 키우

면서 잘해주어라 했다.

그리고는 그 강아지는 보통 강아지가 아니고 족보가 있는 희귀종이고 그 강아지를

키우는 사람들이 모이는 소사이어티가 있다면서 데리고 가서 소개를 해 주었다.

그 아이는 오매불망하던 강아지를 차지하게 되고 덤으로 자기 처지로는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하이 소사이어티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어느 날 그 모임에 갔다가 모두 부부 쌍쌍으로 즐겁게 담소하는데 한 쪽 구석에

우두커니 혼자 앉아 있는 뚱뚱한 노신사를 발견하고 곁에 가서 말동무가 되어 주었다.

그 노신사는 영국 귀족으로서 영국 미국 호주에 소재하는 신문 TV 등 언론 재벌의

회장이고 본처와 사이가 나빠 별거 중이며 사업차 뉴욕에 들리면 그 강아지 소사이

어티에 참석하고 있었다.

말동무하다가 정분이 나고 그리고 같이 지내게 되었다. 런던에 가면 90 몇 세 되는

그의 어머니가 사는 본가에서 거처하고 그가 주최하는 각종 파티에 그와 함께 리셉션

라인에 서는 일까지 했다.


주위 사람들은 그 아이가 신데렐라가 되었다고 했겠지만 자그마한 동양인이 동거인

이라는 어정쩡한 위치에서 그 콧대 높은 영국 귀족 집안의 친지들로부터 얼마나 질

시를 받고 멸시를 받았을까. 그래도 힘이 된 것은 그의 사랑이 지극했고 그의 노모가

그 아이를 무척 좋아한 것이다. 노모는 옷이고 가방이고 신발까지 그 아이와 같은 것

을 하겠다고 떼를 썼다고 한다. 우리 핏줄은 못 속여 남편과 시어른한테 정성을 다

했던 모양이다.

나를 만났을 때는 영국에서의 생활이 너무 힘들어 아파서 시름시름하니까 그가 정양

하라고 일본에 휴가(?)를 보내주었을 때였다. 그는 그 아이가 태어난 일본 교도시의

아주 풍광이 좋은 아라시야마라는 곳에 예쁜 집을 지어 주었다. 생모는 아니나 어머니

라 부르는 안노인이 집을 지키고 있는데 일 년에 몇 달씩은 거기서 지내고 심심하면

도쿄로 나와 친구들과 놀았다.

그 아이는 이쁘기는 하지만 병약하여 늘 병원 출입을 하고 있었다. 병원에서는 특별

히 나쁜 곳은 없다는 진단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고된 시집살이가 원인인 신경성 질환

인 것 같았다.


 

그럭저럭 나도 일본 근무 임기가 끝나 귀국하게 되었다. 나는 양방으로 안 되니 한방

으로 치료하면 혹시 효험이 있을까 하여 그 아이를 서울로 불러 경희한방병원으로 데

리고 갔다. 그 아이는 우리말이 안 되고 의사선생님은 영어도 일어도 안 되니 내가

통역을 하는데 생리에 관한 자세한 사항까지 통역을 했다. 병원을 나서며 그 아이는

나의 손을 꼭 쥐면서 부끄럼도 없이 생리 이야기까지 다했으니 내가 틀림없이 지 아버

지라고 하면서 눈물을 훔쳤다.

그 후 서울에는 자주 와서 내가 안내하는 대로 한복집에 가서 한복도 몇 벌씩 맞추어

입고 우리 도자기 그릇도 사고 장안평에 가서 골동품도 사고했다. 여행이나 쇼핑 등

모든 비용은 카드로 긁어 놓으면 그의 회사에서 다 결제해준다고 했다. 그래서 나와의

식사도 호텔의 최고급 식단이었다. 그러나 어떤 때는 뒷골목을 헤매며 꽁치구이, 돼지

족, 빈대떡, 삼계탕을 잘도 먹었다.


전남 함평에 즈그 아버지 산소가 있는데 성묘 가는데도 날 보고 따라가자 했다. 그 곳

친척에게 부탁하여 건어물, 과일, 술을 준비하게 하여 납죽이 절을 올린다. 나도 절하고

술 한 잔 드리라고 하여 그리 했다. 생면부지의 사람 묘에 절하고 힘자라는 대로 애비

노릇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서울 올림픽 때는 그 남편이 대규모 취재팀을 인솔해왔다. 지금은 없어진 성북동 대원

각에서 대규모 파티를 열었는데 우리 가족도 참석하여 포식했던 기억이 난다. 그를

만나러 우리나라 유수의 언론사 사장들이 많이 찾아 왔었다.


1996(?)년에는 그 아이가 대외협력분야 후원회장으로 있는 로얄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서울에 왔다. 지휘는 고인이 된 에후디 메뉴인이고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을

피아니스트 김 혜정이 협연했다. 그 다음 교향곡은 누구의 것이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역시 대원각에서 뒤풀이 파티를 했는데 나를 아버지로 소개하고 나의 마눌과 함께

상석에 앉게 했다. 그래서 나는 감히 메뉴인과 권커니 자커니 하고 어깨동무하고

사진을 찍었다. 나는 카메라를 가져가지 않았고 직업 사진가가 그것을 찍었는데

나중에 연락이 왔길래 달라는 대로 거금을 주고 지금 가보로 간직하고 있다.


그 아이는 돌아갈 때 작별 인사를 하면 호텔에서든 길거리에서든 나를 허그 하면서

눈물을 좔좔 흘려 사서 나를 쩔쩔매게 했다. 그 아이가 서울에 오면 제일 비싼 호텔의

스위트룸을 쓰는데 하루 밤 비용이 700만원쯤 된다고 했다. 내가 찾아가면 화장도

안 한 맨 얼굴로 내실에서 맞이하곤 했다. 제딴아는 나를 아버지로 생각하고 허물없이

대했다.

 

 

   

그러다가 그 귀족의 본처가 세상을 떠나게 되어 그 아이는 파리에서 그와 정식 결혼을

하게 되었다. 나에게 아버지로서 참석해 달라는 초청장이 왔지만 못가고 대신 당시 영국

대사로 있던 나의 선배 부부에게 부탁했다.

 결혼 후에는 그와의 공식 행사가 너무 많아져 일본에도 한국에도 잘 오지 못했다.

결혼 후 몇 년 안 되어 불행히도 그 귀족 남편이 별세를 했다. 참 기구한 운명이었다.

그는 죽으면서 유언을 하기를 자기의 유골의 절반은 가족 묘지에 안치하고 절반은

한국의 무주 리조트 뒷산 덕유산에 있는 백련사에 안치해달라고 했다. 그 아이의

양어머니가 별세했을 때 그 유골을 백련사에 모시고 제를 올렸는데 그 때 따라 와서

보고 주변 경관에 매료되었던 같다. 또 언젠가 자기가 사랑하는 그 아이가 죽으면

합장하게 될 것도 기대한 것 같다.

 그 아이와 고인의 장남 부부는 유언대로 유골의 반을 한국으로 가져와 한국식 상복을

입고 정식 장례식을 치르고 꽃상여로 유골을 백련사로 운송하였다. 그 아이가 절의

법도도 몰라 유골을 부도탑에 안치해 달라고 간청했다. 절에서는 그 절과 인연이 있는

고승이 아니면 부도탑을 세우지 않는다. 주지 스님은 할 수 없이 절 경계선 밖의 양지

바른 곳에 부도탑을 세우고 유골을 안치했다.

그 보답으로 그 아이는 백련사 소재 전 불상을 금칠하는 개금시주를 했다.

   

이 이야기는 한 6년 전 이야기로 우리나라 신문에도 나고 TV에서도 방송했다.

그리고는 소식이 뜸했는데 재작년 가을 서울에 와서 느닷없이 나를 불러 제꼈다.

호텔로 찾아 갔더니 지가 아는 모모한 인사들을 모아 파티를 한다고 했다. 모두들

서로 잘 아는 사이인데 나는 아는 사람이 없어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한 쪽에

앉아 있었다. 그 아이가 나를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이라고 소개하고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인정으로 가득 찬 사람” 이라고 치켜세웠다. 그래도 모두들 의아한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 아이는 마침 그 다음 날 도쿄 산토리 홀에서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 지휘로

영국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과 교향곡 6번 연주가

있으니 가자고 했다.

 그 사이 그 아이는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후원회장이 되어 있었다. 바이올린

협주곡은 내가 모르는 일본 젊은 남자고 연주도 그렇고 그랬지만 교향곡 6번은

필하모니아의 이름값을 하는 멋진 연주였다.

연주 후 오케스트라 전 단원을 불러 록본기(六本木) 술집에서 뒤풀이 파티를 했는데

그 아이와 내가 상석에 앉아서 세계 톱 클라스의 마에스트로 아슈케나지와 건배를 했다.

사진을 많이 찍어 컴퓨터 마이 픽추어에 간직했는데 바이러스가 침입하는 바람에 다

날아가고 복사지에 프린트해 놓은 희미한 사진 한 장만 증명사진으로 남아 있다.

비행기 일등칸에 오쿠라 호텔에 일본 최고의 음악당인 산토리홀의 필하모니아의

연주회에, 그리고 마에스트로와 전체 단원들과의 뒤풀이 파티까지 참으로 호화판

여행이었다.


그 후는 또 깜깜 무소식이다. 한 번은 지도 알고 나도 아는 사람을 통해 서울을

급히 다녀가며 안부를 전해왔다. 그 아이한테 지금껏 내가 연락한 적은 한번도 없다.

지가 연락하면 내가 만나러 가곤 했다. 지가 하는 일을 지만지만 예기를 안 하니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을 것 같지도 않기 때문이다.

지 친구의 말을 들으면 상속 받은 재산으로 재단을 만들어 아프리카 아이들을 돕는

다고 한다. 북한 아이들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아 한 번은 우리 대통령 부인도 만난

적이 있다.

아무튼 몸 성히 좋은 일 많이 하기를 바라고 생각나면 나를 찾아서 만나자고 하겠지

하고 기다리고 있다.



-참고 -

에후디 메뉴인(1916~1999) 미국의 바이올린 주자. 8세에 샌프란시스코, 10세에 뉴욕,

11세에 파리에서 데뷔 하였다. 10대 부터 이미 훌륭한 기교와 젊음의 매력을 발휘했을

뿐 아니라, 믿기 어려울 만큼 성숙한 연주를 들려주었다. 유대개 연주자 임에도 독일의

푸르트벵글러와 친교를 맺고 더욱 성숙한 연주에 도달 하였다. 런던에 머물면서 스토크

다버논에 어린이 음악 영재교육을 위한 기숙사제 학교를 설립 하였다. 만년에는 지휘자

로서 활약했고 영국 로이알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감독을 역임했다.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1937~)러시아 출생. 양친도 피아니스트였다. 모스크바의 중앙음악

학교를 거쳐 모스크바음악원을 1960년에 졸업하였다. 재학 중이던 55년 바르샤바의 쇼팽

국제콩쿠르에서 차석을 하고, 56년에는 브뤼셀의 엘리자베스여왕 국제피아노콩쿠르에서

금메달을 수상하여 주목을 받았다. 또 62년 모스크바의 차이코프스키 피아노콩쿠르에서는

영국의 J.오그던과 공동 수석을 차지하였다. 63년 서방세계로 망명하였으며, 같은 해 런던

심포니오케스트라와 협연으로 런던 페스티벌 홀에서 데뷔한 이래 세계 여러 나라로 연주

여행을 하였다. 최근에는 지휘자로 활약하여 영국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감독이며 곧

일본 NHK교향악단의 감독으로 부임한다.                                         -이 왕세-



(아마도 200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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