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峙). 재. 령(嶺)
고개를 넘자 그 곳으로 가는 길이 있었다.
이 말은 마치 ‘터널을 지나자 온통 눈 세상이었다.’는 어느 소설의 도입부처럼 내게 들린다.
길은 여느 집 마당으로 드는 골목처럼 어떠한 표식도 없이 수줍게 풀숲에 숨어 있었다.
왕복단차로. 그래서 웬간해선 그냥 지나치기가 쉬운 길.
고개를 다 내려왔는데 초입의 몇 채의 민가를 지나자 길은 곧바로 다시 치솟아 오르는 오름이었다.
그 길의 첫 번째 만남 자작.
이름처럼 작위를 주고 싶은 나무.
숲은 이제 새닢 날 때 그 싱그러움을 지나 성숙한 녹음의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푸른 바람을 쉼 없이 불어내며 어서 오라 반기는 듯 했다.
포장은 이어졌다 끊어졌다 굽이굽이 구절양장으로 산마루를 향해 기어오른다.
전후치. 고개를 지칭하는 말 중에 규모, 길이, 높이에서 어떤 구분과 차이를
두는지 모르겠으나 이 고개의 이름은 전후치다.
이름하여 전과 후가 같아서일까? 왕복 교행도 어려운 단차로. 가이드레일은 물론
어떤 안전시설도 없는 산악형 오프로드이지만 장마철이나 동절기 아니면 승용차도
지나기에 별 무리 없도록 노면정비는 양호한 편이다. 아마도 관광객 유치를 위한
지자제의 노력 탓이리라.
해발 1000미터는 너끈히 될 것 같은 고개 마루를 넘자 발아래 바로 히말라야
산록 같은 작은 마을하나가 나타난다. 부연동이다. 부연이라? 부연이면 재물이
넘친다는 이 부연(富衍)일까? 연기가 피어오른다는 이 부연(浮煙)일까? 아니면
연꽃이 떠 있는 모양이란 이 부연(浮蓮)일까?
손에 잡힐듯 건너편 산록에는 흰 여름 꽃 층층나무, 쪽 동백, 함박꽃무리가 지천
인데 홀연히 실려 오는 이 향기의 정체는? -은은한 향이 대단히 강하고 짙었다.
그리고 길.
우리나라에도 이런 길이 있을까 싶을 만큼 수직으로 암벽을 절개한 좁은 시멘트 포장길이
낙석의 위험을 그대로 안고 놀란 얼굴로 하얗게 빛나니
모롱이마다 멈추며 천천히 그 고개를 넘었지만 만난 차량이라야 꼴랑 3대.
초입의 민박집은 일행의 선배의 집으로 건강상 이유로 10여년 전 낙향했다는데
도시에 사는 후배보다 젊고 건강한 모습이다.
잠시의 수인사와 한담으로 길을 물었는데 세간의 호들갑이 무색하게 모든 곳이
그러하므로 잘 모르겠다니 또 한조각 애매한 인쇄물에 의지할밖에~
온 천지에 꽃.
뻐꾹채. 자주색 붓꽃, 금강초롱 이런 화단에서만 보던 것들이 야생으로 지천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