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
<시월 여행>
난 '콜로라도의 달'을 불렀다
'광장'을 쓴 최인훈의
'화두'란 책의 콜로라도 달의
묘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손에 잡힐듯 선연하다.)
한 이는 이태리 가곡을 아조 멋들어지게 부르고
또 한 이는 딩동댕 지난여름을 부르고....
이렇게 술이 한순배돌듯
노래 한자락씩 부르고
우리 가을여행의 밤은 깊어갔다.
어디서?
1. 떠나기
오월 하늘이 가라앉을 때
난 떠났지
긴 숨을 가다듬고
그래 떠나야 해
아무하고도 아닌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아무도 찾지 않아서
길 위에서
길을 가며
난 생각을 했지
길은 이어지고 이어지고
비는 내리고 또 내리고
나는 간다네
단조로운 자동차 기계음속에 갇힌 이 적막과
얼룩진 빗방울로 단절된 이 외롬과
가끔씩 서보는 길섶 숲속 푸른물 묻어나는 정적 속으로
내 의식은 가끔씩 꺼내어져
맑은 계곡물에 헹구어지고
생각의 실타래는 산허리를 휘감아 오르는 비안개처럼
고삐가 놓여 다만
말없이 늠름한 나무들의 자태만 바라볼 뿐
아무도 없음과
아무일 없음과
아무런 생각도 없는 그 텅 빔 속으로
그래 떠나야 해
오늘 비오니 내일
그 속의 신록은
그 빛나는 신록은
오월 햇살에 정말 눈물나도록 눈부실거야
오월의 하늘이 가라앉을 때
난 떠났지
긴 숨을 가다듬고
2. 용화리 (5월2일)
그래서 다시 찾은 바다는
잿빛으로 납작 엎드려
음울한 울음을 울고 있었다
상처받은 바다
바람은 흉포한 진주군의 말발굽처럼
먼 고원으로부터 거침없이 달려와
사정없이 너의 육신을 유린하고
너 불쌍한 바다는
그 대항의 흰 갈퀴 한번 세우지 못하고
그 위용찬 포효 한번없이
처참한 몰골로 그냥 낮게 울고만 있었다
버림받은 바다
돌보는 이 아무도 없는 바다
그 바다 단애 위
곳부리 등대에 불 밝히고
저 깊고 어두운 심연을 향해
화살처럼 내 교감의 낚싯줄을 쏘아 보낸다
바다야 깨어나라!
아니 잠깐
울고 싶으면 울렴
눈물의 카타르시스를 알지
내일 아침 해맑은 미소로 깨어나면 그뿐
난 알아
저 바람 저렇게 설쳐도
언감생심 너의 그 속 깊음에 견주려고
그냥 내버려둬 제 풀에 지쳐 스러질 때까지
그보다 이렇게 조용하잖니
번쩍이는 번개도 없고
너를 간지럽히는 반짝이는 석양이나 달빛도 없고
높은데서 보는 너는 지금 한없이 침잠하여 울적하지 않니
마치 회한에 젖은 여인네처럼
이럴 때가 좋아 속내 깊은 얘기를 하기에는
내 교감의 낚시를 드리우니
네 살아있음의 통신을 하렴
너를 사랑한다
너를 사랑한다
3. 월천리(5월 3일)
내 뭐랬어
이 빛나는 날씨 좀 봐
하늘 아래 모든게 고개들고 팔 벌리고서
바람의 손길에 환한 웃음으로 화답하며
한없이 향기를 내뿜고 있지 않니
이 충만한 생명의 환희
이 부산한 생명의 유쾌한 소란스러움
대기는 벌써 뜨거워져 발효의 단내를 풍기고
눈은 끝 간 데 없이 맑고 산뜻함으로만 채워져.....
이제 그만
이 모든 걸 한꺼번에 누리기는 죄를 짓는 것 같아
이 모든 걸 혼자서 누리기에는 죄를 짓는 것 같아
쓸쓸함의 빈자리 하나는 남겨두어야 해
호산에서 죽변 가는 길
그 오월 한나절
바다는 어젯밤 눈물을 잊고
한없이 고혹적 청남빛 단장을 하고
하얀 탄성 지르며
눈가는 끝에서 하늘과 맞다아 교접하고 있었다
눈부신 햇살 아래 스스럼도 없이
<보랏빛 시월아침 >
그 눈부신 오월 아침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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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를 지나며
그 옛날 이렇게 쓴 소싯적이 생각나
득 긁어 다시 한번 올려보렸더니
말을 안들어 글자도 들쑥날쑥
고생만 ㅠㅠ
- 1998년 5월2일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