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남쪽바다7

우두망찰 2008. 6. 20. 11:13

 

 

 

 

러나 그건 기대치인 듯 이외로 순조롭다. 투덕거리고 쿡쿡 박히며,

고기의 움직임이 보다 생생히 낚싯대를 타고 전해진다. 튼튼한 장비

탓 일수도 있으리라. 실제 이 낚싯대의 재질은 케블러로서 같은 무게의

강철보다 다섯 배나 강하단다. 아직 줄무늬가 선명한 중치 급이다. 나는

뜰채를 쓰지 않고 덜컹거리는 그 놈을 활처럼 휘어진 대 끝에 달아

그대로 들어냈다. 한 뼘 반쯤, 부담스럽지 않은 알맞은 크기다. 고기는

미처 미끼도 다 삼키지 못하고 입술 부근에 바늘이 걸려 있었다.

나는 살림망을 들어내어 녀석을 넣고 다시 바다로 던졌다.

 

오늘은 행운이다. 날씨와 바다와 고기. 보통은 이 종류의 고기들을 한

마리도 구경하지 못할 때가 더 많지 않은가. 나는 세 마리의 고기로

부자가 된 기분이다. 낚시가 시들해지고, 너무 많은 시간의 무게가

느껴진다. 이 시간 옆에 누구라도 한 사람 있으면 위로가 될까. 무슨

속내 깊은 얘기라도 할 수 있을까?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러나 나누어

두 배가 되는 기쁨이 될 것이고, 그렇고 그런 일상적 유희로 될 터이니.

그런 종류들은 너무 흔하여 구태여 여기, 이렇게 멀리까지 나올 필요가

없다. 일생에 몇 번 갖는 기회라고. 뭔가 다르게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비록 그 결과가 참담할는지는 몰라도.

 

는 편광 글라스를 벗었다.

갑자기 환해지고 생기가 돌며, 주체할 수 없는 빛 속에 내가 있음을 본다.

바다는 빨아들인 빛을 모두 토해 놓는 듯, 세상에 가득한 빛. 빛뿐이다.

나는 너무 눈부셔 고개를 들고 뒤편 바위에 머리를 기대어 실눈을 뜨고

한참동안 그 빛을 바라다보았다. 빛은 직사광선과 수면에 난 반사 된 빛

으로 거의 두 배나 증폭된 듯 직접 대면하기가 부담스럽다. 멀리 섬은 그

빛 속에 갇혀 검은 실루엣으로만 나타나고, 등은 따스하고, 반사된 빛의

온기로 다시 따뜻해진 대기가 이 세상이 아닌 듯 몽환적 기분이 들게 한다.

바다는 그의 실체를 잃었다. 나는 지금 무얼 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무

을 바라고 있는가? 생각하기 싫다. 지금 그냥 이대로 나도 잠시 나의 실체

를 잊고 싶다. 눈을 감는다. 밝음의 이면처럼, 깊이의 어둠처럼, 비껴 보는

바다처럼, 머릿속은 이 시간의 실체로 가만히 내려앉아있다. 누가 이 시간의

실체와 대적을 하리. 뭔가 끊임없이 쓸데없는 생각과 몽상과 의미 없는 계획

을 하여야 하리니.

  ‘좀 있을래’

  ‘그래라’

나는 편안하다. 머잖아 변덕을 부리겠지만.

 


나는 다시 낚시를 드리운다. 미끼가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다. 모자를 내려

쓰고, 그 차양 밑에까지 어른거리는 빛 속에서, 시선은 그때그때 아무데나

편한데다 두고……. 낚싯대를 드는 수고로움으로 시선이 해방된다. 찌를 바라

보아야하는 의무에서 시선이 해방됨으로서 분석하고 추론해야할 머리도 해

방이 된다. 그러므로 보다 철학적인 방법이라고 예전 내 낚시 사부는 말했었다.


세상에 절대적이란 없다. 세상에 절대적 심각성이란 것도 없다. 생각이란 얼마나

자유분방하고 이기적인가. 자기중심적이란 본능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 한계를

이해하여야 한다.

이제 이 빛들은 농익어 풀리고 섞이어, 대기와 유리되지 않고 융화하여 그리곤

흡수되리라. 그가 난 곳으로.


심히 바라보는 바다에 어린 고기들이 튄다.

혹시 모르지. 오전에 새끼 농어들이 있었으니.


~

 

 

밑밥 한 주걱을 물러나는 조류의 머리 쪽에 뿌리고 찌는 보다 멀리 던져 보낸다.

베일을 제쳐 조류의 흐름을 따라 무한정 흘러가게 두고 편광 글라스를 다시 쓰다.

주황색. 어둠의 기색이 보다 분명하다. 저 멀리 찌톱이 가물거린다. 원줄을 검지

에 건다. 보다 분명히 느끼기 위함이다. 몇 번을 감고 흘려보내다 갑자기 길게 풀린

낚싯줄이 옆으로 쏠린다. 재빨리 베일을 원위치하고 릴링을 한다. 옆으로 빠져

내달리는 녀석의 기세가 제법 당차다. 새로운 기대가 솟는다. 그러나 그도 잠시.

순순히 끌려오는 품이 수상하다. 아니나 다를까. 성어에 이른 고등어다. 나는 다시

수염이 그대로인 큼지막한 크릴을 꿰어달아 던진다. 조용한가 싶더니 다시물고

내달린다. 역시 고등어. 그러나 이 크기이면 손맛이야 나무랄 데 없다. 바늘을

빼어 다시 바다로 보낸다. 밑밥 한 주걱. 오늘 분량이 다 되어간다. 이번엔 스토

퍼를 좀 더 밀어 올려 깊이를 더하고는 조금 비켜 멀리 던진다.


지금 계절 여기 바다 속은 고기가 가득한가 보다. 아니면 이 좋은 마지막 햇빛을

집단으로 즐기는지도 모르겠고. 낚싯줄은 쳐다보지 않아도 좋으리라. 이 녀석들의

공격은 거침이 없으니. 그대로다. 갑자기 낚싯대가 쏠리면서 줄이 급하게 팽팽해

진다. 줄을 감기가 벅차다. 그까짓 돔용 3호 경질대가 사정없이 휘어진다. 나도

마지막 햇빛을 즐기려는 듯 드렉을 늦추어 고기의 힘을 보기로 한다. 늦춰진 스풀이

스스럼없이 역회전을 했다. 반 이상 풀렸으니 족히 오십 미터쯤은 되리라. 이제부터

는 내 차례다. 나는 다시 드렉을 조이고 힘들게 릴링을 한다. 용이치가 않다. 너무

먼가? 하지만 풀린 줄의 저항으로 고기도 힘들어할게 분명하다. 나는 천천히 조여

들어간다. 그의 유선형 몸통과 힘찬 꼬리지느러미의 요동이 방향을 바꿀 때마다

그대로 전달된다. 이 종으로는 그렇게 큰 녀석은 아니다. 그러나 고등어의 힘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파워이다. 오늘날 스포츠 피싱의 주류는 보다 섬세하고 연약한

장비로 그 한계성의 큰 고기를 잡는 것을 목표로 한다. 자원의 고갈로 보다 세밀

하고 예민한 조법도 발달하였으리라. 그러나 나는 그런 기법에만 탐닉하는 낚시는

즐겨하지는 않는다. 생각에 따라 즐거움이야 많다. 그리고 나름의 자제로 1년에 두세

차례만 낚시를 다닌다. 하지만 결국 이 모두가 본래적인 것들에 부담이 되는 일. 상호

존중과 애정을 바탕으로 한다지만 살아있는 자, 행위의 그림자가 없을 수는 없으리라.

 

 

 

자기 고기가 반전하여 줄이 중간 간출 여에 걸릴 듯 위태롭다. 나도 승부수를

띄운다. 베일을 제쳐 고기를 멋대로 달아나게 둔다. 사냥하는 사자의 교훈을 무시한

대가인가. 그러나 아쉬움은 없다. 하지만 진지하자. 다행이다. 고기가 방향을

올바로 잡았다. 오늘의 행운의 운세는 내 편이니. 그의 절실한 몸부림이 내겐 쾌감이

되는가? 이 장소에서 이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세상 현실은 그런 건지도

모르지.

이제 글라스는 벗어도 좋을 것이다. 모자도 벗어도 좋겠지. 이마에 맺힌 땀방울로

하여 한결 시원함을 느끼는데, 바라보는 태양은 한발 쯤 남아 황금색 길을 바다에

열어 놓고 나머지는 벌써 눈물처럼 번뜩이는 납빛을 하고 있다. 고기도 이제 지쳤다.

녀석을 들어낸다. 놈이 헐떡인다. 은회색 몸통에 깨알 같은 검은 점. 나는 내 낚시용

칼, 그 섬뜩함을 그의 아가미 밑 급소에 깊숙이 찔러 넣었다.


살림망 속에서 마지막 잡은 한 녀석도 그렇게 한다.

잘 가라. 산다는 것도 이런 건지 모르니.